기괴하게 겸연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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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후 시즌5 2화 지하의 야수 영상

29세기. 지구에 사람이 더이상 살 수 없게 되자, 영국은 나라 전체를 스타고래라는 우주생물의 등에 옮겨 우주를 떠돌게 된다. 인간은 스타고래를 길들이려 스타고래의 뇌에 지속적인 고통을 가한다. 스타고래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단 찰나의 휴식도 없이, 등에 인간을 태우고 그들을 우주의 공허로부터 지켜준다. 만일 스타고래가 인간을 태워주기를 거부한다면 스타쉽 영국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문제는 스타쉽 영국을 지탱하는 체제이다. 닥터는 그곳을 감시사회라 진단한다. 감시자는 도시 곳곳에서 인형의 눈을 통해 시민들을 지켜본다. 시민들은 인형의 눈 앞에서 순종적인 것처럼 보인다. 강력한 규율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저항하는 시민 앞에서 흉악하게 일그러지는 인형의 얼굴을 보자면 그곳은 빅브라더의 지배하에 있는 억압적이고 끔찍한 전체주의 사회인것만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스타쉽 영국의 시민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시민은 5년 마다 투표를 할 수 있다. 시민은 '진실'을 보게 된다. 우주선의 진실. 고래를 착취함으로써, 고래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집과 땅과 생명을 이어나간다는 그 불편한 진실을 말이다. 시민은 선택을 하게 된다. 잊거나, 항의하거나. 오직 3%의 시민만이 항의 버튼을 누른다. 여왕 역시 선택을 한다. 진실을 잊고서 연임을 하거나, 아니면 퇴위하거나. 후자의 선택은 체제의 포기를 뜻한다. 시민은 추방당한다. 그리고 여왕의 퇴임은 고래를 억압에서 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빨간 약 줄까 파란 약 줄까?>

 

이것은 하나의 도덕적 게임 이론이다. 먼저 시민 입장에서 살펴보자. 이방인인 에이미는 거의 반사적으로 '잊기'를 누른다. 시민에게 각 선택지에 따른 정보는 구체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잊기'를 선택했을 때 그것이 이 감시사회와 그것에 자유를 반납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함을, 또 '항의'를 선택했을 때 어떤 징벌이 있을지를. 그것은 시민을 온전한 도덕적 딜레마에 빠트린다. 결과가 베일에 가려졌을 때, 그 결과와 자신의 선택 사이의 수량적 관계를 알지 못한다면, 그때 개인으로서 무엇을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도덕적인 것, 그리고 그것을 추구했을 때 잃는 것, 포기했을 때 얻는 것 사이의 판단이 마비됐을 때, 그때 내릴 수 있는 결정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판단, 가장 정직한 판단이 아닐까? 그렇다면 여왕의 입장은 어떤가? 여왕은 선택지가 좀더 명확하다. '연임'을 누르면 체제를 승인하고 '퇴위'를 누르면 나라가 파괴된다. 오직 3%의 시민만이 항의를 선택하고 여왕은 수 차례나 연임을 해왔다. 이 두 선택의 차이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다. 민주사회의 권력은 시민의 동의 하에 작용한다. 민주사회에서 민주적이라는 개념은 절차가 온당한지 여부를 가늠하는 말이다. 하나의 자의적인 결과를 위해서 절차를 왜곡하는 것이 전체주의 체제이다. 민주사회는 반대이다. 수단은 결과를 정당화한다. 닥터는 조롱하듯, 혹은 탄식하듯 말한다. "참 민주적이군." 그렇다. 그곳은 민주사회이다. 시민에게는 투표권이 있으며 이 체제가 올바른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주권자 즉 시민에게 있다. 시민은 지배에 동의했다. 이런 예를 현실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주민등록증의 지문이나 인터넷 실명제라든가 골목길의 감시카메라에 동의했다. 고래는 어디 있는가. 국제 자본의 흐름이 안겨주는 유복한 문명 생활 이면에 산재한 기아와 내전, 임금 불균등, 혹은 직접적인 유비로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폭력을 우리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직시했을 때, 반문이 꼬리표처럼 따라잡는다. 만약에 그러한 것들이 그토록 부당하다면 그것이 방지해주는 온갖 걱정거리들은 어쩌라는 말인가? 우리 사회의 치안은, 브랜드 커피숍에서의 여유로운 도취는, 스타쉽 영국의 안위는 어떻게 보장하란 말인가?


<이곳은 감시사회다. 하지만 그것은 동의받고 위임된 감시이다. 시민들은 후천적으로 주어진 자신의 선택권을 온전히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주어진 자신의 처지에 동의 혹은 거부로 의사표시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현대 민주사회와 놀랍도록 닮은 모습이 않은가. 우린 우리가 속한 국가와 제도에 대해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그저 따라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선택을 한 적이 있다. 순응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시민의 선택은 여왕의 선택과 분명히 대조된다. 여왕이 육화된 권력이자 상징화된 주권을 나타낸다면, 시민은 권력이 작용하는 장소를 나타낸다. 여왕의 선택은 권력의 솔직한 욕망을 담지한다. 여왕에게는 절대의지로서의 주권이 있다. 그 체제를 계속 유지시킬지 무너트릴지는 전적으로 여왕의 손에 달렸다. 그에 비해 시민의 선택은 전적으로 유보되었다. 딜레마는 사실 성립하지 않는다. 시민 앞에 던져진 것은 깨알같은 글씨로 쓰인 계약서와 그의 인감도장 뿐이었다. 평범한 시민, 일상을 하루하루 영위할 뿐인 소시민에게 그 계약서는 까마득해 보일 뿐이다. 시민은 권력의 인증서에 도장을 찍는다. 진실이 일상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고개를 돌릴 뿐이다. 나는 인간의 선천적인 도덕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판단은 유보되었고 5년마다 갱신되어 끊임없이 유보된다. 이것이 현대의 권력 모델이다. 여왕은 냉정하게 국가사를 결정한다. 섣부른 온정주의는 국가 전체의 안위를 해할 수 있으므로(이를테면 군대를 해체한다 생각해보라) 지배자는 철혈의 군주가 될 수밖에 없다. 권력자는 대신 국민에게 계약서를 내민다. 국민의 동의하에, 모든 사회 모순은 공인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권리로서 누리고 있다는 통념은 일단 옳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민주주의가 더욱 교묘한 그물로 우리를 죄여오고 있다는 사실 역시 엄연히 존재한다.


<자, 오늘도 난 문제 일으키러 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닥터는 바로 이 11대 닥터이다. 그를 보기 전까지는 테닥이 두말할 나위 없는 최고의 닥터라고 생각했으나 고작 이 화를 보고서 난 갈아타고 말았다. 부디 나의 지조에 자비심을!>


여기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더는 말하지 않겠다. 이미 지금까지 한 말로 말하지 않은 것까지 말해졌다고 본다. 이 화의 결말로도 뭔가를 얘기할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밝히지 않겠다. 난 가급적 스포일러는 피하고 싶으니까. 궁금한 사람은 직접 보시길. 대신 다른 이야기를 끄집어내보자. 어슐러 르귄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 이야기의 직접적 모티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작품이다. 오멜라스라는 도시는 지하 감옥에 갇힌 한 가여운 아이의 희생으로 존속한다. 하지만 진실을 안 사람들은 차츰 도시를 떠난다. 그래서 제목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지구를 떠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떤, 미약하나마 우리 자신에게서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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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도에 쓴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과목 답안;;;;

물론 손으로 쓰느라 이거보단 구성이 더 조악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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