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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후 시즌4 11화 미드나이트 영상

2013년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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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후는 말하자면 sf의 클리쉐 혹은 맥거핀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sf로 보기에는 작중 설정이 너무 쉽고(이를테면 외계인에 대한 반격으로 갑자기 툭 등장하는 가상의 에너지 전환법을 사용한다든지) 플롯 구성은 사실상 활극에 가깝기 대문이다. 때문에 골수 sf 애호가들은 닥터 후를 스타트랙이나 스타워즈 등과 묶어서 일종의 사이비 sf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닥터 후는 오직 sf만이 담을 수 있는 서사적 획기성을 종종 보여준다. 시간 여행과 각종 다른 종족들, 그리고 닥터로 풀어갈 수 있는 에피소드는 하드 sf의 문법과 활극이 자연스레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미드나이트 편은 사실 기존 닥터 후 에피소드와는 조금 다른 에피소드이다. 굳이 닥터 후의 에피소드일 필요도 없어 보이며 외계인의 정체를 곧바로 밝혀버리는 다른 편과 달리 '적'은 끝끝내 수수께끼로 남는다. 폐쇄된 공간, 승객들 사이에 침투한 미지의 존재, 그리고 갈등은 전형적인 미국산 재난 영화나 바디스네쳐 물의 형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닥터 후에서는 여기에서 시리즈가 우직하게 이끌고 가는 캐릭터의 가능성을 덧댄다. 바로 닥터 말이다.

닥터는 언제나 브릴리언트한 기지로 사건을 해결한다. 이번 화는 아마도 뉴닥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닥터가 위기에 몰렸던 순간이 아닐까 한다. 데이비드 테넌트의 열연이 단연 돋보이는 화라고 할 수 있다.


휴가를 떠나는 열차. 바깥으로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광선이 내리쬐고 열차는 멈췄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적이 저벅저벅 다가온다. 적에게 감염된 승객 스카이는 이상한 징후를 보인다. 바로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그것이 어떤 해를 끼칠지 알 수는 없지만 바로 그 점이 공포다. 승객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정체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이 침입자에 대한 처우 문제로 갈등을 빚게 된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대중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군중심리가 작동하며, 이성이 간여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인지이다.

각 인물들은 군중심리를 조장하는 군중속의 각 개인을 대표한다. 왼쪽에서부터 디디, 교수, 아내, 제트로, 스카이. 승무원이랑 남편은 안 나옴. 다 나온 샷을 찾을 수가 없네ㅜㅜ


승무원은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위험 요소를 서둘러 제거하려 한다. 바로 스카이를 살인 광선이 내리쬐는 바깥에 버리자는 것. 여기에는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경제적 합리주의가 바탕이 돼 있지만 인명을 리스크의 하나로 취급해도 좋은가 하는 질문은 배재돼 있다.

교수는 직업 그대로 식자 역할을 한다. 지식인의 역할은 인간 이성을 깨우치고 지식으로 미지의 것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담론을 생산하고 그 틀을 독점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그는 타 행성의 전문가이며 자신의 학식에 따라 이미 발생하는 현상에 대해 '그럴 리 없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일정한 세계의 틀을 고수하는 기득권자의 자세와도 같으며, 변화하는 세계를 기성 세계에 편입시키려고 시도하려는 것이다. 이는 동행한 제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교수는 돌발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제자 디디에게 다그침으로 일관한다. 이 상황에서 교수는 대중의 판단을 승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디디는 도전적인 젊은이이다. 교수의 지도를 받고 있지만 자신만의 생각을 전개하는 데 거침이 없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승무원의 주장에 동참한다. 그의 젊은 이성은 아직 미숙하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에 도취된 나머지 근본적인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역시 흐려지고 만다. 달리 말해, 그는 젊은 냉소주의자이다. 상황에 대한 동물적인 합리성을 곧 이성이라 생각하며 죄수의 딜레마를 최악의 상황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적이 닥터의 목소리를 훔쳤을 때 그것을 간파한 사람 역시 디디였다.

아내는 히스테릭한 군중이다. 스카이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데 그 속도는 점점 빨라져 마침내 거의 시차가 없이 동시에 말에 달라붙게 된다. 이 정체불명의 현상에 그는 이성을 잃고 두려워하며 울부짖고 절망적인 분위기를 조장하고 타인의 판단마저도 흐리게끔 하며 자신의 믿음하에 사실마저 왜곡해버린다. 군중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람의 불안감에 영향을 받는다. 극단적인 상황 하에서 그 상황을 부추기는 것은 두려움에 소란을 피우는 몇몇 인물들이다. 그들만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 상황도 그들로 인해 복잡해진다.

남편은 쉽게 동조하는 인물이다. 역시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성을 잃었으며 자기 감정에 따라 목소리를 높이고 사실마저 왜곡하며 직접 정말 정교한 에피소드라고 느낀 것이, 닥터와 대립할 때 제일 먼저 승무원이 반박을 하고나면 그 다음 바로 동조하는 것이 이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험악한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목소리가 큰 이들이며 이들의 가세로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커져간다.

스카이와 닥터. 이름도 모르는 외계생물과 닥터의 대결 장면은 최고의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이번 화는 서스펜스로도 전 시즌 통틀어서 최고 수준이 아닌가 한다.


스카이는 선동가이다. 처음 모두의 말을 따라하던 그는 닥터만이 유일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닥터를 물고 만다. 스카이와 닥터의 상황은 역전된다. 닥터의 말을 따라하던 스카이는 이제는 닥터의 말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 닥터가 그의 말을 따라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그는 이제 감염된 자는 닥터이며 닥터를 내보내야만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충동질한다. 이로 인해 합리주의자 집단(디디)을 제외한 나머지는 만장일치로 닥터를 내다버리려 한다.

닥터는 사실상 이 화의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담당하는 캐릭터 특성상 그는 결코 이성을 잃지 않는다. 닥터는 말한다. "우리는 뭡니까? 살인을 공모하는 인간들입니다." 그의 지적은 정확하다. 사람들은 판단력이 흐려져 있으며 공포심에 사로잡혀 스카이를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이 침입자는 말을 따라하는 것 말고는 아무 해도 일으키지 않았다. 아직 스카이의 인격과 생명의 안위가 확인되지 않은 이상, 그대로 현장을 유지한 채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이 가장 이성적인 판단이다.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당신이 이를테면, 인구 조절을 위해 하층민이 사는 하천에 독을 풀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공리주의자 따위라면 말이다. 하지만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군중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며 그들의 판단은 전적으로 타인에게 유보되고 분산된 채 자신의 책임을 경감하려는 소극적인 회피동작에 불과하다.

닥터와 사람들이 논쟁중일 때 제트로는 말한다. "난 투표권도 없어요?" 닥터는 곧바로 다그친다. "투표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 투표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공공의 이해에 관한 것이다. 생명은 그렇게 투표로 간단히 결정할 수 없다. 대중은 너무나 나약하다. 쉽사리 감정에 휘둘리며 너무나 간단히 서로에게 감염된다. 대중에게 퍼지는 공동의 인식은 전염병과도 같다. 대중이 서로에 대한 폭력성이 단 하나의 대상으로 모아질 때, 희생양이 탄생한다. 희생양은 그들이 갖다 붙인 그 어떤 이유와도 상관 없는 이유로 희생당한다. 그것은 공포심이다. 독일인의 유대인 학살. 일본군의 아시아 각지에서의 만행. 그것은 전부 동일한 것을 공유한 집단 내부에서 암묵적으로 행해진 동의, 만장일치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중의 오판과 이른바 민의라 불리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문제로 떠오른다. 이에 대해 언젠가 이야기해 볼 날이 있으면 좋겠다.

덧글

  • 존도우 2015/04/17 18:32 # 삭제 답글

    브릴리언트!
  • 멧가비 2015/06/25 13:48 # 답글

    재난 상황에서의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걸작 에피소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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