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하게 겸연쩍게

darobeck.egloos.com


포토로그


메종일각 오프닝, 슬픔이여 안녕 음악

마이페이보릿띵즈 쓰며 같이 언급하려 했는데 깜빡 잊고 빼버려서(..) 독립 포스트로 씀.

일단 들어보시라.




1. 손 안의 산들바람이 빛 속에서 반짝반짝 불어오면
방금 지은 미소로 낯선 사람에게도 인사를 건넬 수 있었어요

당신과 만날 수 없어서 녹슨 시계를 잡고 울었지만

* 끄떡없어요! 눈물이 마른 자국에는 꿈으로 통하는 문이 있어요 마냥 고민하고 있음 안돼

언젠가 슬픔이 닥쳐와도 친구를 맞이하듯 미소지어 보일게요 ...꼭 약속할게요

2. 흩날리는 꽃잎들이 머리에 어깨에 팔랑팔랑 속삭여요
만났던 횟수만큼 이별도 있는법이죠,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추억이 넘쳐흘러도 난 지지 않아요

* 끄떡없어요! 가슴의 틈새로 행복이 들어올테니 한숨은 쉬지 않을거야

슬픔은 갑자기 찾아오겠지만 친해질 수 있도록 할게요 ...그렇게 약속했는걸요

끄떡없어요! 눈물이 마른 자국에는 꿈으로 통하는 문이 있어요 마냥 고민하고 있음 안돼

그래요, 친구를 맞이하듯 다정하게 미소지어 보일게요 ...꼭 약속할게요

슬픔은 갑자기 찾아오겠지만 친해질 수 있도록 할게요

...그렇게 약속했는걸요



애니메이션 오프닝 엔딩이나 삽입곡은 대개 등장인물의 정서를 대변하곤 한다.

이 곡의 주인공은 쿄코다. 갑자기 찾아온 슬픔. 남편의 죽음 이후 그래도 씩씩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내용이다. 작품을 끝까지 보고나서 가사를 따로 찾아봤는데 그 뒤로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쩌면 이렇게 한 구절구절이 절절한 거냐. 슬픔은 갑자기 찾아오겠지만 친해질 수 있도록 할게요. 그렇게 약속했는걸요... 이게 대체 뭐다냐. 이렇게 심장 깊숙히 찔러 들어오는 가사라니. 제목 그대로 슬픔이여 안녕.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나의 것이니 받아들이겠다는 이 무슨 실존주의적인 씩씩함이다냐...

쿄코는 이 다짐대로 작중 거의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꿈을 꾼다거나, 이따금 혼자 슬퍼할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씩씩함을 유지한다. 그게 남편을 잊어서도 아니고 새 남자를 찾고 있어서도 아니다. 과거를 과거로 남겨두고 현재를 살아가야 하니까. 그뿐인 거다.

이 곡은 곡 자체도 너무 좋다. 싱어 목소리도 그렇고 편곡이며 멜로디며 뭐 하나 안 좋은 부분이 없다. 특히 후렴부분 헤이키! 하고 치고들어오는 부분을 들으면 진짜 막 행복해짐. 쿄코가 주먹을 꼭 쥐고 헤이키! 라고 하는 것 같아서. 일본에서는 뭐 대대로 꾸준히 리메이크되고 커버되고 하는 모양이다. 내가 본 것만 해도 세 번이니까...

만화, 애니, 음악 이렇게 완벽한 컨텐츠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일본이 정말이지 부럽다. 그런데 엔딩곡이나 이후 시즌의 곡들은 별로 안 좋아함.


[My favorite things] (1) 메종일각

My favorite things

 

장미에 맺힌 빗방울과 고양이의 수염. 밝은 놋쇠 솥과 따뜻한 털벙어리 장갑…… My favorite things의 가사에서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골라보았다. 목록을 고민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재료들이니까. 이 것들은 내 의식에 무의식에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나처럼 생각하고 지금의 나처럼 느끼는 나를 만들었다. 내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살아온 날들을 반추해보기 위해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


 

그 첫번째. 메종일각 by 다카하시 루미코


※ 스포가 포함돼 있긴 하지만 루미코 월드의 기본 전제라고 할 수 있는 스포이니 대체로 무해합니다.


 

 

러브코미디의 신은 존재한다. 그 신은 여자다.

 

어딘가에서 떠도는 격언을 인용해 보았다. 여기다 남성향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싶지만 그러면 원본과 너무 멀어질 것 같아서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자. 90년대. 그때는 일본 문화 개방의 전조가 흐르는 시기였고 각종 일본발 해적 만화가 온 동네 초딩들 사이로 스며드는 시기였다. 그때의 분위기는 마치 세기말 같았다. 지존파니, 휴거니, 삼풍백화점이니, 성수대교니 하는 흉흉한 사건 사고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고, 그 화려한 라인업 사이에 변태 일본 만화도 끼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잠자는 부르마에게 팡팡을 하는 손오공, 꼬추를 내놓고서 코끼리 흉내를 내는 짱구, 그리고 물을 끼얹으면 여자로 변하는 데다 걸핏하면 아버지를 두들겨 패는 란마 등은 순진한 당대 한국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화적 자극이었나 보다.

 

나에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시기로 돌아가 당시 떠들어댔던 아주머니 단체라든가 기독교 단체 등은 란마의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을 인지했는가 확인해보고 싶다. 란마를 다시 본 것도 2000년대 이후고 그 작가가 여성이라는 것을 안 것도 그 이후였다. 작가의 성별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그린 장편 만화는 거의 모두 남성향 소년만화였기 때문이다. 90년대에는 소년향 소년향 만화의 구분이 엄격했다. 그때는 주간 만화잡지가 그래도 제법 팔렸고 잡지 성향에 따라 성별이 거의 정확히 나뉘었기 때문이다. 내 오랜 편견으로는 여성 작가는 턱이 뾰족하고 눈이 솔방울만한데다 체형은 무슨 에반게리온 같은 인종불명의 미소년 미소녀 그림을 그려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란마와 이누야샤를 그린 작가의 성별에 대해서는 난 한 순간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남자라고 전제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그냥 내가 인간인 것만큼이나 말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루미코의 전매 특허 심통난 표정.>   

 

내가 메종일각을 보게 된 것은 란마를 다시 접한 뒤로도 수년이 지나 성인이 된 뒤였다. 처음 본 것은 애니메이션이었다. 그 동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화수로 96화나 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애니메이션을 어째서 보려고 마음먹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하여간 이 작품을 처음 접하고나서 나는 이렇게 느꼈다. 이게 바로 개종이구나, 하고. 그야말로 나는 무장해제 상태였다. 이 작품은 문화예술이 나에게 가할 수 있는 감동의 임계점이 어디인지 알려주었다.

 

모든 대중문화는 불편함을 의식적으로 거세하고자 한다. 나는 그것을 조작적 안락함이라고 부른다. 조작적 안락함이 최대치에 이른 장르가 바로 일상물이다. 갈등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으며 추함도 없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미형 모에 캐릭터의 큰 굴곡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영원성이다. 어제와 같은 일상이 아무런 의외성 없이 오늘도 반복될 것 같은 영원함, 애정하는 캐릭터가 결코 나이를 먹을 것 같지 않은 그 영원함 말이다. 만화에서 현실성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그만큼 만화 내에서 인위적인 조작이 많이 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조작이 많아진다면 극은 점점 안정적이게 되고 그것을 보면서 가슴 두드릴 일은 없게 되며 가슴을 졸이며 몰입할 일도 없어지게 된다. 위기는 작가가 마련한 안전한 장치를 통해 해소되며 갈등은 그리 심각하지 않게 마무리된다. 반대로, 조작적인 비극을 부여하는 경우 역시 있다. 한국의 막장드라마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뜬금없이 사람이 차에 치이거나 병에 걸리는 그런 전개 말이다. 문제는 불편함과 안락함 사이의 균형이다. 비록 어느 쪽의 극단이라 하더라도 그 안락함, 불편함이 설득력 있다면 그 작품은 장르 내부에서 최적의 효과를 거둘 것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독자는 그것을 보며 그 세계관이 크게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 제시되는 사건과 갈등은 끊임없이 현실적인 고민을 상기시킨다. 갈등은 위기를 겪고 사건은 파국으로 치닫거나 예상치 못한 반전을 맞아 해소된다. 보통 범 취향의 영화라든가 베스트셀러 소설이 대개 이런 식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조금 더 판타지를 보장해주는 쪽을 생각해보자. 독자는 분명히 안락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성의 판타지가 반영된 히로인이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평범하고 여러모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자 주인공에게 여러 미소녀가 알아서 달라붙는다. 하지만 몹시도 설득력 있고 진솔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판타지와 현실이 최적의 시너지를 얻는 이상적 비율로 조합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작품이 바로 메종일각이었다. 모든 러브코미디의 최종 목표가 히로인과 이어지는 것이라면 이 오토나시 쿄코는 가히 끝판왕급 난이도의 상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라이벌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쿄코는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작에는 없는 애니만의 오리지날 대사가 있다. “죽은 사람은 무적이다.” 죽은 사람과는 애초에 라이벌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쿄코의 남편이었던 소이치로의 얼굴은 작품 끝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데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은 고다이 역시 마찬가지다. 잡히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유령같은 존재를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해야만 하는 대 위기에 빠지고 만 것이다.


<루미코의 만화는 템포가 빠르다. 한 컷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는 만화가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러한 컷 연출법을 애니메이션화할 때에는 컷 사이의 행간 해석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애니메이션은 시간의 연속체니까. 그 사이를 어떻게 메우느냐가 성패의 갈림길. 최악의 경우는 원피스같은 연재와 동시에 방영되는 저예산 애니들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작품 내 상황과 인물 배치 등을 조절하고 오리지날 씬을 삽입함으로써 컷 사이를 잘 채워주고 있다. 고다이의 이 독백은 매우 중요하다. 본격적인 이야기 전개를 알리는 선전포고와도 같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만 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내가 루미코를 러브코미디의 신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작품이 러브코미디의 전형을 확립했다는 점 외에도(우유부단한 주인공, 하렘과 역하렘이 얽힌 갈등구조, 핵심 인물들 사이의 오해와 착각 그리고 그들과 독자 및 주변 인물들이 아는 진상의 차이 등등) 그 끝판왕을 깨는 과정이 아름다우리만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고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쿄코는 츤데레라고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사실 츤데레의 전형은 아니다. 차라리 한국적인 표현인 새침데기가 그를 설명하기에 더 적절한 표현 같다. 평소에는 누구에게든 친절하고 상냥하고 체면 차리지만(제페니즈 스마일을 생각해보자) 가족 앞에서라든가 아니면 질투할 때에는 줄곧 심통을 부리고 험한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가 선사하는 갭 모에는 이런 부분이다. 사실 그는 이미 80년대에도 스스로 구닥다리라고 말할 만큼 시대에 뒤떨어진 현모양처적인 여성이다. 맨션 관리인을 하고 있지만 그건 시댁에서 준 일자리일 뿐이고 본인은 아무런 경제적 능력이 없다. 그를 둘러싼 남성들은 항상 네가 쿄코 씨를 먹여 살릴 수 있느냐는 문제로 다툰다. 그는 다분히 전통적인 남성관을 반영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결코 남성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현실의 제약 속에서 항상 욕망의 주체라는 점을 내비친다. 그 점이 현대 남성향 만화/애니와의 결정적인 차이다. 쿄코는 전통적 가부장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연애 자체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영웅이라뇨. 전 그저 망치를 든 요물일 뿐이에요=_= 루미코의 작품에는 이렇게 요괴화 된 노인이 종종 등장한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니시오이신의 <고양이 이야기 백>은 그 이전 시리즈와는 달리 하네카와 츠바사가 화자로 전면 등장한다. 그는 전편의 화자인 아라라기 코요미를 짝사랑하고 있었고, 아라라기 역시 그를 좋아했지만 두 사람은 별것 아닌 이유로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나가게 된다. 이후 아라라기는 센조가하라와 사귀가 된다. 이 작품에 벡델 테스트를 한번 적용해볼까? 벡델 테스트는 영화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 알아보려고 만들어본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요건은 다음과 같다. 1.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2명 이상인가. 2. 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3. 그 대화가 남성에 대한 것 이외의 것인가. 이 간단한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영화가 부지기수, 아니 대다수다. 이 테스트의 의의에 대해서는 별도로 얘기해보도록 하자. <>은 어떤가. 여기서는 아라라기가 단 한 장면 등장한다. 그 외의 모든 인물은, 아버지를 제외하면, 여성 캐릭터다. 당연히 대화 내용은 아라라기에 대한 것 이외의 것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작품의 여성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네버. 이 작품은 벡델 테스트의 맹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모든 여성은 아라라기에게 서사적으로 종속돼 있다. 기본적으로 이 시리즈는 불행한 소녀가 주인공에 의해 구원받는 이이기. 소녀가 괴이와 연루되고, 아라라기는 온갖 수를 동원해서 그를 구원한다. <>에서는 과거 아라라기에게 구원받은 여자들이 잔영처럼 등장한다. 아라라기는 잠시 종적을 감춘 상황이지만 거의 모든 곳에서의 대화는 그의 부재를 뼈대로 형성된다. 아라라기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이미 서사는 그의 존재를 전제하며 모든 여성 캐릭터들은 마치 아라라기의 형상대로 틀을 만들듯이 자신의 위치를 그의 주변적인 것으로 한정한다. 벡델 테스트의 3번 항목, 남자에 대한 것 이외의 대화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라라기에 대한 대화의 비중이 문제가 아니라 이 상황을 아라라기의 부재로 규정짓는 나머지 캐릭터들의 포지션이 문제다. 그리고 종국에는 왕의 귀환이 이뤄진다. 마치 수백 페이지의 예언과 선지자들의 찬양 끝에 메시아가 강림하는 것처럼. 하네카와는 불행하다. 그것은 그의 가정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택받지 못한 비련의 여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판에서는 그의 모놀로그 사이에 극 내용과 상관없는 이미지씬이 연출되는데 그것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홀로 세계여행을 다니는 하네카와의 모습이다. 비록 직접적으로 밝힌 바는 아니지만, ‘남자에게 선택받지 못한 서브 히로인이 결국 다른 남자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홀로 세상을 떠도는그림이 충분히 그려진다.


   <만일 쿄코는 남편을 잃은 비련의 여주인공이고 고다이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찾고 마침내 행복하게 되었다. 따위의 주제의식을 띠고 있었다면 난 이 글을 안 썼을 것이다.>

 

소위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여성의 가치와 존재 목적이 남성과 이뤄지는 데에 있는 플롯에서 <이야기 시리즈>는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이런 패턴은 신데렐라보다는 서브컬쳐 논리로 접근해야 옳다. 상당수의 오타쿠 대상 스토리가 이런 판타지를 반영하고 있다. 신데렐라가 왕자님에게 귀속되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을 반영했다면, 오타쿠 물에서는 그러한 여성 캐릭터를 지배하고자 하는 남성의 욕망에 주목한다. 주의하시길. 여기서 욕망의 주체는 캐릭터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다. 주인공 남자 캐릭터는 오히려 욕망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그것은 교태다. 자신의 욕망을 숨김으로써, 혹은 자각하지 못함으로써 상대 여성 캐릭터의 욕망은 부추김되고, 이른바 플래그가 꽂히며 여성 캐릭터는 주인공에게 종속된다. 말하자면 애가 닳고 얼굴을 붉히는 묘사를 통해 데레상태가 된다. 만화/애니의 하렘 구조는 대개 이런 식으로 형성된다. 주인공은 히로인들의 욕망을 주재하는 의 자리에 오르고 독자는 히로인들의 플래그를 대리 수집한다. 이것은 작가와 독자의 은밀한 밀약이다.

 

이런 밀약이, 메종일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트레이트다. 주인공 고다이는 주민들의 등쌀에 더는 재수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을 것 같아 일각관(정발판은 영 번역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처음에는 한일맨션이라 했다가 나중엔 도레미 하우스로 바뀐다. 난 어지간하면 국내 정식 발매 매체를 기초 텍스트로 삼지만, 이 작품은 굳이 원어와 관습적 명칭을 따르도록 하겠다)을 떠나려 하지만, 새로 들어온 관리인을 보고 곧바로 결정을 철회할 만큼 얼빠진 녀석이다. 그는 자기 마음을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노출시켜버린다. 술을 마시고 동네방네 고함을 지르며 고백을 해버린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기억 못하지만, 어차피 그가 쿄코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주변사람들에게 기정사실이다. 일각관 주민들은 내도록 그 사실을 약점 삼아 골탕 먹인다.


<인물들의 전통적인 남녀관에 대해선... 노파심에 자꾸 언급하려 하는데 자제. 자제. 혹시 이해 안 가면 따로 질문하기를.>   

 

그렇다면 쿄코는 어쩌다 고다이에게 마음을 주게 된 걸까. 이 과정이 작품 전 분량에 걸쳐서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전 남편 소이치로를 잃은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쿄코의 부모는 쿄코를 하루빨리 재혼시키려 한다. 하지만 쿄코는 부모의 말에 마치 중학생처럼 반항한다. 고다이에게 이미 마음이 기운 뒤에도 쿄코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는 스스로 밝힌다. 이대로 다른 사람을 만나면 소이치로를 사랑했던 자신의 마음은 가짜가 될지도 모르니까. 작품 내도록 쿄코는 이 속박과 싸운다. 고다이는 도저히 쓰러트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보스에게 끊임없이 도전한다. 언제나 그들은 오해를 달고 다니고 별것 아닌 것에 질투한다. 일본 러브코미디가 대개 학창시절의 한 순간을 그리고 있는 데에 비해, 이 작품은 재수생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의 긴 시간을 다룬다. 그들의 티격태격하는 일상은 크리스마스를 몇 번을 보내는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녹아든다.

 

고다이가 획득한 것은 플래그 따위가 아니다. 고다이는 이 연애 게임에서 한 번도 주체적인 위치에 선 적이 없다. 비록 고다이 주변에는 왠지 모르게 다른 여성들이 꼬이고 쿄코는 질투의 화신 같은 질투를 보이며 사실상 이것이 쿄코가 갈등하는 계기가 되지만, 쿄코는 결코 고다이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고민을 하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고다이를 선택한다. 비록 연애가 서사의 최종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애가 인물의 권력관계를 좌우하지 않는다. 당연히 플래그의 대리수령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고다이와 쿄코는 언제나 상호작용하며, 두 사람의 거리는 항상 두 사람이 얽힌 상황에 따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유동적으로 변한다. 때로는 서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그저 아무런 전진이나 후퇴 없이 각자의 생활을 하기도 한다. 설령 쿄코가 고전적인 가부장적 여성상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이 문제와는 상관없다. 그의 가부장적 태도는 단지 시대상에 따른 캐릭터의 성향일 뿐, 그 캐릭터가 나타내는 함의와는 무관하다. 그의 감정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처음에는 관심이었다. 괴롭힘 받는 고다이를 걱정하는 보육원 교사와 같은 관심 내지는 동정이었다. 그는 고다이가 칠칠맞게 흘리고 만 자신을 향한 마음을 일상적으로 접한다. 그러다가 고다이에게 자꾸만 여자들이 달라붙고 질투를 하게 된다. 저 사람의 진심은 무얼까 의심하고, 갈등한다. 고다이는 자꾸만 신뢰를 잃는 짓을 하고 둘은 티격태격한다. 사소한 갈등은 결국 오해였음이 밝혀진다. 라이벌이 등장하여 이따금 고다이는 적극적 어필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하지 못하고 소이치로에 대한 마음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과정 하나하나가 15권에 걸친 에피소드들을 통해 진득하게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진실성은 여기서 나온다. 밀당할 줄 모르는 주인공. 그는 욕망의 주재자로서의 주인공, 히로인을 감정적으로 종속시키기 위한 주인공이 아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과 상호작용하는 히로인은 데레로 규정될 수 있는 히로인이 아니다. 이들은 누군가의 대상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인간이다. 구체적인 공간에서 구체적인 시간을 살아가고 나이를 먹는 주체다.


<루미코는 끊임없이 작중 인물들에게 현실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취직을 못한 고다이는 이렇게 삐끼 짓이라도 하며 바둥대야 한다. 그들이 사는 곳은 일본의 구체적인 어느 땅, 어느 시대이다. 고다이에게 있어서 생활의 문제는 곧 사랑의 문제다. 스토리는 결코 연애로 환원되지 않는다. 설령 이후에 후일담에서 이들이 이혼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까지 감내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결코 완결나지 않는다.>    

 

이러한 설득력, 그리고 거기에 가미된 판타지의 조화. 남성향 판타지를 대변하는 이 히로인에게 전에 없고 이후에도 없을 개성과 생명력이 부여된 것은 루미코가 남성이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 독자는 이 작품을 보고서도 쿄코를 단지 소비할 여캐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쿄코는 어느 히로인과 비교하더라도 주체적이고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 러브스토리가 아름다운 이유다. 대체 사랑이 무얼까. 그 많은 러브스토리에서 연인들은 어째서 서로에게 사랑에 빠질까. 내가 본 작품 대부분에서 그 이유는 명확히 그리지 않는다. 가장 많은 사유는 첫눈에 빠졌다는 것. , 그게 가장 낭만적인 이유일 것이다. 사랑에 구차하게 이것저것 갖다 붙이면 없어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그 없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진실돼 보일 수도 있다. 메종일각에서 보여주는 가장 큰 정서는 이게 아닐까. 사랑은 서로의 인생을 감내하는 것. 고다이는 소이치로의 무덤에서 말한다. “당신은 이미 쿄코씨의 일부니까요. 하지만 저, 최선을 다하겠어요. 처음 만난 그 날 부터 쿄코씨의 마음 속엔 당신이 있었고, 저는 그런 쿄코씨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을 포함해서, 쿄코씨를 안겠습니다.” 재수생에서부터 취업 재수생까지. 그 실질적 기간 동안 초등학생이었던 이쿠코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게 되었다. 당연히 히로인도 나이를 먹었다. 그간 벌어진 숱한 에피소드를 나는 엔딩의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그들은 서로를 충분히 이해했고, 충분히 원했다. 그야말로 해피엔딩의 가치가 있다. 비록 루믹 월드에서 예견된 엔딩이지만 나는 그들의 결말을 목격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은 내 생애 최고의 러브코미디다.

 

만화판은 총 15, 애니판은 TVA 96, 두 편의 극장판, 2부짜리 드라마판이 있다. 만화판은 루미코의 만화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 애니판은 아침 햇살이 한가로이 내리쬐는 듯한 평화로운 일상과 옛스런 향취를 고의로 자극하는 것 같은 편집, 시마모토 스미의 청아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각각 섭렵할 필요가 있다. 만화 치고는 길지 않은 편수긴 하지만 TVA판은 그 에피소드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에 화수가 매우 길어졌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서 도전해보길. 정발판은 번역이 문제지만 보는 데 지장은 없다. 종종 중고 매물이 보이긴 하는데 난 수년 째 완전판으로 재발매하기를 기다리느라 애써 외면하는 중이다. 제발 내달라고! 완전판 발매를 기다리는 사람 한 트럭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이 글을 읽은 당신은 메종일각을 봐야 한다.


배트맨 대 슈퍼맨을 쉴드쳐보자. 영상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2016)

스포포함!!!!

이 영화는 정확히 <맨 오브 스틸>(2013)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다. 아예 조드의 매트로폴리스 침공사건에서부터 사건이 시작되며 배트맨의 기본 동기는 여러 군데에서 알려진 바대로 거기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슈퍼맨의 심리 묘사를 맨 오브 스틸에 밀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잠시만 맨 오브 스틸(이하 맨옵스)을 복습해보기로 하자.

아서, 아니 클라크 빼박, 아니 그냥 캔트는 올바른 아버지로부터 정말 올바른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삼촌의 유언을 가슴에 새기고 그것을 시리즈 전체의 주제의식으로 발전시키는 기특한 피터 파커처럼, 그는 올바른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준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하는 말임. 클라크의 아버지는 말한다. 너에게 그런 힘이 주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상이 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나서지 말거라. 그 말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토네이도 목숨을 버린다. 클라크는 아버지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고개를 젓는다. 클라크는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 그가 아버지를 떠나보내면서까지 지키려 한 아버지의 말이 어떻게 인생 전체에 걸쳐 영향을 끼쳤을 지 상상해 보시길. 그의 선에 대한 부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렇게 형성된 사고 프로세스는 두 영화 전체를 아우른다.

말하자면 그의 선행은 자기 힘에 대한 책임이고 소명의식이고 정언명령이다. 거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다. 선을 구성하는 복잡한 양상을 고민하지도 않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으며 의심하지도 않는다. 조드는 엄밀히 말해서는 슈퍼 히어로 도상학적인 빌런이 아니다. 그는 크립톤 행성을 되살린다는 ‘대의’를 통해 행동하는 인물이다. 인류와 조드 일당의 입장은 선악으로 나눌 수 없다.

조드는 말한다. “내가 태어난 유일한 목적은 크립톤을 지키는 것이다. 내 행동이 아무리 폭력적이고 잔인할지라도, 그것은 내 사람들의 큰 좋음(greater good)을 위한 것이다.” 잠시 상기. 크립톤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가 사회에서 맡을 역할과 능력이 유전적으로 정해진다고 한다. 조드는 그렇게 태어난 전사 계급이다. 이 대사에서 greater good을 정식 극장판에서는 뭐라고 번역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이 외계인들의 생김새나 사회구조를 통해 미루어 볼 때, 이 말의 고전철학적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플라톤식 기능적 정명사회가 떠오르지 않는가!). 고대 그리스어 아가톤agathon은 영어로는 good이라고 번역되고 이는 한국에서는 ‘선’이라 번역되다가 최근에는 ‘좋음’, ‘탁월함’으로 번역되는 추세다. 왜냐하면 이것을 ‘선’이라 번역할 시에는 의미상의 오해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동양적 전통에서 선은 다분히 도덕적 의미를 지닌 반면, 고대인이 말한 아가톤은 도덕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탁월함’ 목적 혹은 결과로서의 ‘좋음’을 뜻한다. 목수가 망치질 잘 하고 정치인이 말 잘하고 뭐 이런 거.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조드의 말은 ‘크립톤인의 생존’ 내지는 ‘복리’에 가까운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의나 선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서로 총구를 겨눈 상태에서 누가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 네가 죽냐 내가 죽냐의 문제에 더 가깝다는 뜻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맨옵스에서 클라크의 선택은 정의의 문제와 동떨어져 있다. 그에게 조드와 싸울것인가 말것인가의 문제는 단지 크립톤을 선택할 것인가 인류를 선택할 것인가, 혹은 결정론적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 자유의지를 선택할 것인가에 국한되고 만다. 그는 얼떨결에 영웅이 되고 말았지만 이 시점에서 그는 영웅이 아니었다. 초월적인 의지를 가지고 어느 종족의 생존이 나을까 저울질하는 존재. 그에게 영웅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여준다면, ‘신’ 말고 다른 표현이 있을까?

그 신이 이번 작품에서 추락하고 만다. 바로 다름아닌 인간에 의해서. 배트맨은 심사가 단단히 꼬여 있었다. 이건 마치 팀 버튼의 배트맨을 보는 것 같다. 박쥐놀이를 시작한지 20년이 지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했다. 그가 슈퍼맨을 보는 시선은 명백히 질투다. 그가 슈퍼맨을 적대할 이유가 있을까? 메트로폴리스가 파괴돼서? 글쎄. 어린애도 슈퍼맨 이전에 조드가 먼저 난리를 쳤다는 것을 알지 않겠는가. 그는 우선 슈퍼맨을 믿지 못한다. 그 까닭은 자신이 그와 동일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 세계관에서 배트맨은 악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살인까지 거리끼지 않으며 낙인까지 찍어댄다. 낙인도 가벼이 넘어갈 설정이 아니다. 공공선과 사적인 선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던 베일 브루스와 달리 그는 더욱 독단적이고 더욱 위법적이다. 클라크가 수집한 기사들에 따르면 배트맨은 이전 영화들에서보다 더욱 신뢰받지 못하는 존재다. 정당하지 못한 힘을 지닌 자가 다른 힘을 가진 자를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불신은 원망의 감정으로 옮겨간다. 이 두사람의 상태는 짝패 상태에 있다. 하지만 배트맨 쪽이 더 구차하다. 그는 슈퍼맨을 불러들이면서 말한다. “네 부모는 너에게 무엇을 가르쳤지? 난 없어!” 이걸 보라. 명백한 <배트맨>(1989)에서의 배트맨의 재림이 아닌가. 조커에게 트라우마의 원인을 전가하는 그 비굴한 녀석 말이다.

렉스 루터가 왜 슈퍼맨을 미워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신 행세를 하는 쫄쫄이 녀석이 눈꼴시렵기 때문일까?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작중에선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새로운 렉스 루터고 꽤나 근사한 캐릭터지만 딱히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굳이 격을 따지자면 <배트맨 포에버>(1995)의 리들러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리들러는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앙금이라도 있었지. 감독이 주목한 것은 이 신을 추락시키는 과정 자체였던 것 같다. 그나마도 명쾌하지 않아서 문제지만. 여하튼 맥락은 보인다. 이 영화에서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기소당한 신’이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커다란 힘을 지닌 존재를 우리는 승인해야 하는가. 렉스 루터는 슈퍼맨을 청문회에 출석시키는 데에 성공하고 그 자리를 폭파시켜 범죄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그리고 본래는 직접 하려던 모양이지만 마침 배트맨이 크립토나이트를 훔쳐간 김에 배트맨을 이용해 슈퍼맨을 잡으려 한다. 혐의를 받은 슈퍼맨이 배트맨에 의해 살해당한다면 신은 그 지위를 잃게 되는 것이다. 슈퍼맨은 때때로 인간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초월자, 즉, ‘불안’을 가져오는 자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동시에 ‘인간’에게 살해당한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 증명되는 셈이니까. 그래서 슈퍼맨에게 말하지 않는가. “넌 약하다”고.(이때의 정확한 대사 아는 분 제보좀. 핵심이 되는 대사라 생각하고 기억하려 하다가 휘발…ㅜ)

기소당한 신. 그는 신을 자처한 적도 없으며 영웅의식을 보인 적도(그의 코스튬은 단지 크립톤의 유니폼이었다!), 대의를 추구한 적도 없다. 그의 선행은 어떤 조건도 없는 그의 초자아의 발현일 뿐이다. 그를 신의 자리에 위치지은 것은 단지 상황과(조드랑 관련된) 인간의 불신 때문이었다. 작품의 원제가 Batman V Superman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VS.가 아니라 V다. 이것이 무엇의 약자인지, 해외 언론이나 인터뷰에서 밝힌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성실함이 부족한 관계로 영화 내용을 통해서만 보자면, 그것은 신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말한 게 아닐까 싶다. 배트맨이 인간을 대표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 해석은 조금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 배트맨은 멋대로 질투하고 멋대로 단죄한다. 그리고 그게 인간이 아닌가. 여기서도 배트맨은 영웅이 아니다. 기계적이리만큼 집요한 영웅서사였던 놀란 3부작에서 다시 팀 버튼의 배트맨으로 돌아가버린 셈이다.(두 배트맨의 차이에 대해서는 내 이전 포스트 참조) 루터가 말한 대로다. 이건 인간 대 신의 싸움이다. 영웅 대 신도 아니고 영웅 대 영웅도 아니다. 요약하자면 질투심에 불타는 한 인간이 악당의 계략에 넘어가 신과 맞짱 뜨는 이야기. 이게 이 영화의 가장 큰 골자다.

슈퍼맨은 런닝타임 내도록 소외된다. 루이스 앞에서 징징대던 광경을 떠올려보자. 그는 슈퍼맨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캔자스의 클라크이기를 원한다. 슈퍼맨은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일 뿐이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청문회 출석에 응해 화를 자초한다. 이 장면이 말하는 놀라운 서사논리가 보이지 않는가! 그 상원의원의 연설문을 떠올려보라. 그는 민주주의는 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결코 일상적인 청문회 장면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런닝타임 내내 시간에 쫓겨 허둥대는 연출을 보라! 그런 한가로운 장면이 들어갈 틈이 있겠는가). 여기서 감독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곳은 공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공적인 공간이다. 그런데 여기에 가장 사적인 존재가 들어와 있다. 초자아는 결코 상징화될수 없다. 그러니까, 개인의 선의는 결코 제도를 통해 검증할 수 없다. 슈퍼맨은 그러한 점에서 철저히 인간들에게 소외된다. 슈퍼맨이 마지막에게 한 대사를 보자. “내겐 네가 세계야.” 그대들은 이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가? 세계로부터 유린된 개인은 세계로 치환한 한 대상에게 몰입한다. 내가 희생하는 이유는 대의 따위가 아니라 단지 사랑하는 너를 지키기 위해서다. 결국 그는 개인으로서 죽고 미국은 그의 빈 관을 들고서 예포를 쏜다. 그래도 그 국가적 예우 장면이 슈퍼맨이라는 기표를 공적인 세계의 영웅으로 편입시켜준 게 아니냐고? 네버. 데일리 플랜트 국장의 태도를 살펴보자. 그는 판매부수를 위해 헤드라인을 멋대로 정하는 인물이다. 슈퍼맨의 부고는 데일리 플랜트 지면을 통해 알려진다. 그가 유도하는 것은 즉각적인 이슈일 뿐, 시민들의 애도를 반영하는 게 아니다. 장례식 장면 역시 그 어떤 사회적인 메시지도 담지 않았다. 하비 덴트의 죽음을 기리며 하비 덴트 법의 의의를 논하던 <다크나이트 라이즈>(2012)에서의 추도식 장면과 비교해보자. 만일 그렇게 되려면 적어도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하다못해 데일리 플랜트 국장이 나와서 슈퍼맨은 우리의 친구였다든지 하고 지껄이는 식의 연출을 넣어줬어야 한다. 영화에서 그의 장례식은 의장과 고향에서의 쓸쓸한 장례식을 교차해 보여줄 뿐이었다. 그는 개인으로서 죽었다.

배트맨과 슈퍼맨의 화해 말이다. 여기서부터 단순한 액션영화로 바뀌긴 했는데 아마도 많은 사람이 여기에 의아함을 느낄 것이라 생각한다. 화해하는 논리야 부족함이 없지만 문제는 서사 자체다. 이 장면이 어색해 보이는 까닭은 위와 같은 인간 대 신의 대결과 소외라는 심리 서사에서 갑자기 공공의 적을 물리치는 우지끈 쾅광 하는 이야기로 흘러갔기 때문이지, 거기에 개연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지나치게 성급하고 너무 많은 것을 우겨넣으려 했다. 그리고 연출 자체가 섬세하지도 못했다. 어떤 영화의 패인을 논할 때 시나리오와 감독의 책임을 놓고 보자면 난 시나리오 쪽에 한표를 주련다. 장황한 원작을 군더더기 없는 한 편의 영화에 쑤셔넣었던 <왓치맨>(2009)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난 왓치맨을 누가 만들어도 그보다 나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빼곡한 서사의 밀도에 질식하거나, 아니면 아예 몇 부작으로 장황하게 만들거나. 그러니까, 원작의 재현을 지상과제로 삼은 영화 중에서 말이다.

결론은 잭 스나이더가 주화입마에 빠졌다. 이거.

메갈리안에 대한 소고 사회


2015년을 살아온 한국인이라면 아주 높은 확률로 메갈리안이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메갈리안에 대한 새로운 글이 나왔을 때 거기서 역사라든가 연혁이라든가 활동이라든가 여타 구구절절한 정보를 찾으려는 사람은 솔직히 적을 것이라 생각한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관심 있는 부분은 메갈리안의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대리전이 아닌가. 우리가 열을 올리는 부분은 언제나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둘러싼 찬반논란이 아닌가. 너는 좌파니 너는 우파니 너는 메갈이니 너는 여혐이니... 당연히 나 또한 그렇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내 견해를 정리한 글을 적어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키보드를 들지조차 못한 이유는 이 끝이 없는 대리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 또한 삶에 있어서 명확한 내 잣대가 있는 만큼 남들이 벌여놓은 판에 뛰어들고 싶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 때에 메갈리안에 결정적인 사건이 생겨났다. 바로 메갈리안의 분화다. 메갈리안은 동성애자 비하에 관한 문제로 큰 내홍을 겪었고 마침내 워마드라는 분리 사이트가 생겨나고야 만다. 거기다가 이제는 글 리젠도 시원찮은 모양이다. 내부적으로 시들해진 건지 아니면다른 문제가 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현자 코스프레좀 하자면 난 이는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미리 글을 써두었다면 그곳은 성지가 되었겠지만 아쉽게도 방금 말한 이유로 예언을 미루고 있었고 이렇게 뒤늦게나마 메갈리안의 의의와 한계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경고하는데, 이 글은 ‘여성혐오가 한국에 만연하고 그것이 중요한 사회적 과제이며 논쟁의 초점은 메갈리안이 적절한 방법인가 아닌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는 글이다. 만일 한국이 여성 상위 사회라든가 여혐 내지는 여성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거나 현존하는 여혐은 ‘일부’ 여성에 대한 당연한 비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얌전히 뒤로가기 버튼을 눌러달라. 당신은 아직 이 글을 읽을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메갈리안에서 제기되는 여성혐오적 사례들은 타당한 측면이 많다. 그들이 문제삼는 것은 전통적으로 페미니즘이 문제삼아온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새로울 게 없는 주장들이다. 각종 사회적 지표라든지 아니면 여성 개개인이 겪어온 차별적 대우, 그리고 언어생활에서 묻어나오는 남성위주의 세계관 등은 이미 마르고 닳은 소재들이다. 그게 이제 와서 회자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이제 와서 대중이 페미니즘의 언어를 입에 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학계라든가 소수의 비평가, 지식인들이 아무리 유효한 지적과 분석을 해주더라도 그게 대중에게 유통되지 않으면 사회를 전혀 바꿀 수 없다. 그에 비해, 여성혐오 정서는 대중 내에 자생적으로 파고들었다. 당연하게도 민간에 그 말이 퍼졌다고 해서 그게 옳은 말은 아니다. 우리는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데카르트에 대해 간단히 배우면서 4대 우상을 배우지 않는가. 거기서 뭐가 있었나. 시장의 우상이라고 기억하시나. 교과서라는 게 너무도 중요한 사실을 너무도 당연하게 설명하는 바람에 그 개념에 대해 제대로 숙고하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우린 300년 전 사람이 지적한 그 점을 새삼스럽다며 가벼이 지나치고서는 그 오류를 다시금 범하고 만다. 네가 아는 여성에 대한 편견은 말 그대로 시장의 우상이다. 나는 여혐 담론이 퍼진 결정적인 사건이 익명의 네티즌이 작성한 ‘여성부의 만행’ 리스트라고 장담한다. 그 리스트는 물론 거의 모든 부분에서 허위고 조작이다. 하지만 설령 그것이 허구임을 알더라도 당신의 머릿속에는 이미 설령 정부 부처는 정권에 따라 그 성향이 달라지고 운영상 다소간의 문제점은 어느 부처나 마찬가지의 일이라 하더라도 굳이 ‘여성부가 세금낭비를 하는 기관이라는 점’ 설령 평생 페미니즘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 없고 그들이 뭘 말하는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굳이 ‘꼴패미는 문제라는 점’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는 일베 등지에서 극우 담론이 번성하자 거기 포함된 소수자 혐오 정서와(혹시나 해서 말한다. 여성이 세상의 반인데 왜 소수자냐, 라는 의문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면 역시 재빨리 뒤로가기 버튼을 눌러달라. 이 글은 당신이 볼 만한 글이 아니다.) 화학 작용이 일어나 ‘맞아 그렇지’ 하는 반응을 이끌어내게 된다. 말하자면 현재의 여성혐오현상은 단순히 ‘남들이 그렇다니까’ 몇 개의 사례를 보고 그것이 일반화할 수 있는 문제인 양 여기는 아주 초보적인 오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잔상과 결부되어 강한 심리적인 신뢰도를 얻는다. 이 고등학교 수준에서 비웃음 당할 만한 오류가 반복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단순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선판단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지식인 몇몇이 타개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안 된다. 그들이라고 뭐 진중권처럼 전국민을 상대로 무쌍을 벌이고 싶지 않겠는가. 그건 현실적으로도 힘든 일이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시민사회에 건전한 담론이 유포되도록 하는 것은 지식인의 책무다. 그러나 담론이라는 것이 의도대로 흐르는 것이겠는가. 오히려 손도 못 대고 불구경을 해야 하는 식자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그런데 이제 대중이 뭉쳤다. 아니, 여성주의를 말하는 단위의 대중이 이제야 비로소 생겨났다. 그들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겪은 불합리함을 말하기 시작했고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유포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메갈리안으로 유입되는 인구는 어떤 홍보나 기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고무적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메갈리안을 찾는다. 지금까지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서 살던 여성이 메갈리안이 그렇게 난리치는 것을 보고는 인식의 틀이 해체되어 비로소 자신이 억압받던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네들 말로는 ‘코르셋을 벗었다’고 하고 좀더 전통적인 표현으로는 ‘계급의식을 인지’했다고 한다. 즉, 여성이 한국사회가 성차로 인한 계급사회라는 점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계급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그 어떤 사회에도 총체적 의미의 ‘사회’ 혹은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히 통계적 지표를 사회라고 받아들인다면 그건 대단한 오류다. 통계적으로 말한다면 다수결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그 나라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 어른들의 흔한 사고방식을 보라. ‘대통령은 궁민의 대표이니 함부로 모욕하는 건 궁민에 대한 모욕이다.’ 대충 국가주의적 논리 하나를 구성해 보았다(내가 실제로 들은 말이기도 하다). 어떻게 일부의 표로 선출된 단일한 개체가 인구수 전체를 대표하는가? 선거가 나타내는 것은 단지 사회 균열뿐이다.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어떤 집단의 욕구가 다른 집단의 욕구보다 수량적으로 많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각 후보는 주창하는 바가 다르고 공약하는 바가 다르다.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시민은 후보자가 대표하는 가치관, 이를테면 분배와 성장, 증세와 감세, 평화와 복종 등의 항목들을 열거한 뒤 조금 더 자신의 가치관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표를 준다. 물론 이는 원칙적인 얘기일 뿐이다. 과거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만으로 이 균열을 표현했지만 이제 현대인들은 자신이 복합적인 욕구가 중층으로 놓여 있다는 것을 안다. 비록 멍청해빠진 소리지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은 안보를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새누리당 후보를 찍는다고 하는 선언은 결코 비합리적인 말은 아니다. 그는 비록 정당들의 지향점과 거짓말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의 최우선적인 욕구만큼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욕구를 나누어 그 대표를 세워 행정과 입법을 담당하게 하는 제도다.

젠더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오래 전부터 이런 말이 있었다. “주자 양반이나 맑스 양반이나 집에 들어와서 설거지 안 하는 것은 똑같다.” 떠도는 경구 같은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다는 점은 이해해주시길. 하지만 이 문장이 핵심이다.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자칭 진보주의자라 하더라도 그에게 내재된 가부장적인 민폐는 보수주의자나 마찬가지라는 비판이 이미 오래 전부터 행해지고 있었다. 노동 문제와 젠더 문제는 실제적으로 서로 다른 층위에서 다뤄진다. 사측과 정부의 부당함에 온몸으로 맞서는 활동가라 하더라도 가부장적인 의식을 벗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재밌게도 이런 식의 비판은 현재의 메갈리안에서도 주요 이야깃거리로 끄집어내지고 있다. 세간에 비교적 진보적인 어조가 강하다고 알려진 오늘의 유머에서 젠더 감수성이 전무한 게시글들을 비웃고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메갈리안들은 오유더러 일베의 용어인 ‘선비’를 가져다가 동일한 맥락에서 비웃는다. 즉, 겉으로만 입바른 소리를 해댄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현상이 말하는 것은 메갈의 존재 자체를 정당화해준다. 서로 다른 층위의 의식화가 이러한 서로 어긋난 균열 상태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것은 계급의식화되지 않은 계급은 착취관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갈리안이 없었다면 아직도 여성들은 젠더라는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균열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메갈리안은 대한민국에서 여성 스스로가 젠더적 감수성을 의식적으로 사유하고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킨 최초의 사례다. 페미니즘은 지지하는데 꼴패미는 지지 못하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꼴패미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는 거의 확실히 평소에 페미니즘에 대한 사유를 해본 적 없으며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니 그만큼 꼴페미라는 자기 정의에 부합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한국에 언제 페미니즘 운동이 있었다고 기껏 등장한 대중운동더러 꼴패미라 부르는가? 어떤 집단이 있다면 내부에서 과격파도 나오고 온건파도 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페미니즘은 단 한 번도 사회의 화두로 올라선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대중운동화 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먼저 나서서 그 극단화를 걱정한다는 건 시기 상조를 넘어선 무책임한 훈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가장 논란이 되는 문제를 살펴보자. 그들이 결집한 건 좋다 이거야. 그렇지만 미러링은 다른 문제가 아니냐. 그것은 단지 폭력을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그것이 전술적인 효과가 있는가?

굳이 말하자면 미러링은 폭력이 맞다. 그것은 처음부터 뚜렷하게 폭력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행해졌고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성의 폭력성을 그대로 되돌려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반복 설명하는 것을 이해해달라. 메갈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만 갖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거울은 상을 그대로 되돌려준다. 그 용어가 미러링인 이유는 상대의 행동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이니까. 상대의 행동이 폭력적이라면 당연히 그 반사각 역시 폭력적이다. 영어로 쓰자면 Mirroring이다. 다른 뜻은 전혀 없다. 말 그대로 ‘거울로 니 얼굴을 비춰준다.’는 뜻인 것이다. 알겠는가? 다시 말한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원본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확실히 하자. 메갈리안에 기겁하는 사람들이 접한 그들의 과격 발언들은 대부분 자생적인 게 아니라 어딘가 커뮤니티에서 ‘자발적으로’ 쓰인 여성혐오 내지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글, 기존에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던 그런 글들을 그대로 성별만 바꿔 쓴 것에 불과하다. 어째서 원본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데 왜 여성이 그것을 그대로 따라한 글은 공포의 대상이 되는가? 그 사실로부터 우리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폭력이라 하니 꼭 언어 폭력이나 신체적 폭력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줄로 안다. 하지만 여기엔 사회적인 차별의식, 여성이 육아 독박을 뒤집어 써야 한다든가, 여성만 육아휴직을 내야 한다든가, 여성은 명절에 시댁을 먼저 찾아야 한다든가, 제사를 같이 지내야 한다든가, “여자는 일 시키면 시집 간다고 금세 그만두겠지.”라고 말한다든가, 가사일은 남자도 도와야 한다든가, 혹시 잘못 본 사람이 있을까 싶어 반복하는데, 가사일은 남자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든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의무도 다하지 않으며 권리만 주창한다”라는 말을 내뱉은 적 있다든가(대상이 누구이든)... 등등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모든 사항에 해당한다. 물론 이것은 예일 뿐이고 사례를 들자면 무궁무진하다. 이러한 남성, 혹은 사회가 부과하는 가치에 충실한 여성의 행동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직 가부장적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다. 남성 위주로 구성된 세계관에서 단 한 치의 상대성도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자신이 세계의 전부인줄 안다. 배고프면 젖이 나오고 엉덩이가 축축하면 기저귀가 갈린다. 중의적인 표현에 주의하자. 아기는 정말로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만이 전부인줄로 안다. 하지만 그는 젖을 떼면서부터 자신과 다른 외부 세계의 존재에 대해 하나씩 알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방안의 사물들, 피상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외부의 이미지들, 단순한 이미지의 총합이 그가 인식하는 세계일 뿐이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그것들이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고유한 원리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타인 역시 인격이란 게 있으며 나의 행동에 따라 타인 역시 기분나빠하고 기뻐하고 반응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은 혼자 이뤄지지 않는다. 부모가 지속적으로 말을 걸고 타인과 무수히 접촉을 하고 직접 걸어다니며 만져보지 않으면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남성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극도로 삼갔던 조선 말기의 사대부들을 생각해보라. 유럽 탐사대원과 접촉하기 이전까지 원시적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던 오지 부족들을 보라. 모든 진보는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고대 문명이 꽃핀 지역은 단 한 군데의 예외도 없이 주변 환경과 끊임없는 교류를 하던 곳이었다. 인식 역시 마찬가지다. 인식 역시 고유한 옹벽 안에 갇혀 있다면 외부의 것을 생각하기가 힘들다. 말하자면 누군가가 옆에서 “어째서 여성의 외모는 남성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그는 좀처럼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조차 알아채기 힘들다. 그러나 인식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변호하려 한다. 외부 문명의 침입은 실제적인 물리력으로 인해 저항할 방도가 없지만 인식만큼은 스스로 그 문을 닫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 페미니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고(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게 80년대다)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비판은 이 나라 어느 곳인가에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하지만 그것을 들은 척 하지도 않은 것은 이 사회다. 유일하게\ 유의미한 반향을 일으킨 것이 바로 미러링이었다. 바로 그 터무니없는 언사들을 그대로 주체만 바꿔서 보여주었을 때에야, 거울을 들이밀며 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의 페미니즘은 사회의 추악한 얼굴을 말로 묘사해주는 데 그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귀를 막은 사회는 그것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대중이 억지로 거울을 들이밀었을 때에야 비로소 입질이 왔을 뿐이다. 미러링 또한 폭력이라는 비난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거울의 상이 너무 추하지 않은가!”

거울은 현실을 반영한다. 하지만 결코 거울은 현실이 아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현실을 반영한다 하더라도 결국 거울은 2차원의 평면공간일 뿐이다.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유리천장, 성폭력, 만연한 여성 비하적 어휘, 데이트 폭력, 염산테러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전히 행해지지만 미러링은 오직 넷 안에서만 존재한다. 게다가 그것은 네티즌 인구 중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여혐은 도처에 존재하지만 메갈리안은 단 한 곳(이제는 두 곳이지만)뿐이다.’ 당신이 만일 메갈리안의 언어폭력을 문제삼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 중립조차 지키지 못한 비겁한 행동일 뿐이다. 만연한 실제적 폭력에는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으면서 오직 자기 방어적이고 국지적인 언어폭력에만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폭력은 폭력이다’라는 언술조차 성립시키지 못한다. 단지 강자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네가 정말로 폭력에 관심이 있다면 근본적이고 실체적인 폭력을 최우선순위로 비난해야 합당하다. 그렇지 않은 비난은 일상적이고 무자각적인 보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법 집행이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시위대의 단면만 보고 폭력시위 운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러링은 사고구조 역시 상대의 것을 따라한다. 김치녀라는 어휘가 비난받아야 하는 점은 그 단어가 여성을 김치녀와 개념녀로 재정의 내리고 모든 여성을 그 틀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김치녀를 입에 올리는 멍청이들은 늘 말한다. 네가 김치녀가 아니면 되는 게 아닌가? 찔리지 않으면 왜 열폭인가? 즉, 너는 김치녀인가, 개념녀인가? 내가 말하는 이 기준에 해당하는 여성은 김치녀이다. 만일 네가 개념녀라면 내 말에 기분나빠할 이유가 없다. 이런 논리이다. 말하자면 이 논리는 일부의 논리가 아니다. 이미 김치녀를 거론하는 순간부터 그는 ‘몇몇 눈꼴시려운 여성’만을 일컫는 게 아닌 여성 전체에 언어 프레임을 뒤집어씌운 셈이다. 마녀를 물에 빠트려 놓고 살아나면 마녀, 죽으면 무고한 사람이라고 판정내리는 것과 같다. 이를 남성들에게 돌려준 한남충이라는 어휘 역시 마찬가지다. 너는 한남충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강요하는 것은 너는 김치녀인가, 아닌가? 하는 지금까지 여성들이 떠맡아야 했던 딜레마를 돌려준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불편해하는 남성의 경우의 수를 분류해보자. 김치녀 프레임에 아무런 문제의식도 못 느끼던 사람이라면 역시 한남충이나 씹치라는 어휘에도 반응하지 않으면 된다. 어차피 네가 한남충이 아니라면 뭣하러 신경 쓰는가? 만일 김치녀 프레임의 부당함을 인지하고 있었고 또한 거기에 대한 미러링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좋다. 마음껏 비판해 보시라. 그에겐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사자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를 언어의 틀 안에 가두는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음에도 그 틀에 무고하게 갇힌 순수 피해자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남성의 ‘만연하고’ ‘무자각적이고’ 오히려 ‘당당한’ 언어습관에 대해 비판적이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인터넷상에서 누군가가 “씨발련”이라고 욕을 한다면 “넌 상대의 성별조차 모르지만 단지 욕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상에게 –년을 붙임으로써 여성성을 단지 비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라고 비판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페이스북 김치녀 페이지를 신고하고 “페이스북 규약에 어긋나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을 받은 뒤 페코의 부당함을 논한 적이 있을 것이다. 만일 네가 남성 언어 사용의 부당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미러링은 똑같은 차원의 폭력, 상대를 자신의 언어적 틀로 정의내리는 폭력의 부당함에 맞설 수 있다. 하지만 난 이런 반론은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비판은 단지 실제 사물은 방치한 채 거울에 비친 상만을 향하고 있다. 이건 전형적인 성폭력 피해자 잘못 운운 하는 논리와, 여성을 걸레라고 칭하는 언어습관과도 너무나 닮아 있다. 거울의 상이 더럽다고 느껴진다면 그 근본 원인은 실제 사물에 있다. 그런데도 무자각적인 양비론자들은 실제 사물보다 거울의 상만을 최우선적으로 비난한다.

적어도 메갈리안에서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잘못이라는 자기 모순적 주장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메갈리안을 비난하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미러링을 비난하면서 메갈련, 메오후, 메퇘지, 메족발, 무슨무슨 년 등의 어휘와 욕설을 입에 담곤 한다. 그들은 폭력성을 비판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는 게 부당하다면서 스스로 폭력을 동원한다. 이게 왜 모순인지 상술하진 않겠다. 멍청이를 멍청이라고 명명하는 데에는 그냥 비웃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메갈 운동은 일종의 테러리즘적 성격을 띠고 있다. 테러리즘은 군사적 수세에 있는 자들이 비대칭적으로 동원 가능한 폭력 수단이다. 김구와 김원봉의 테러리즘이 선량한 일본인들과 일본 식민관료에게 적응해 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이라도 끼쳤을 것 같은가. 테러리즘은 결코 대중의 동의를 얻을 수 없다. 메갈리안에 대한 비난여론역시 그들이 자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테러리즘은 체제의 불안전성을 드러낸다. 테러리스트가 한국에 잠입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이 한국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알고 있다면 어느 곳을 노리겠는가. 바로 비정규직화된 공항 보안체계가 아니겠는가. 세월호 침몰 때에도 배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사장과 승무원들은 비정규직이었다. 편의점 알바생에게 야간 편의점 보안 책임까지 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적대국이 북한이어서 망정이지 만일 우리가 보상 빵빵하게 받는 정규군과 대치하고 있다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세뇌교육과 푼돈 조금 받고 근무 서는 나약한 우리 노예군이 상대가 될 것 같은가? 성공적인 테러가 증명하는 것은 그런 시스템의 빈틈이다. 멍청한 상상하지 말길. 테러가 옳다는 말이 아니다. 미러링이 테러 자체라는 것도 아니다. 메갈리안의 의의는 단지 여성이 스스로 자각하고 만연한 남성 위주 사회 문제를 깨닫게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미 종종 나오던 말인데, 그들은 니들의 알량한 지지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그런 것을 걱정했으면 과격한 운동은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일부 여성 집단이 자신과 자신의 성별은 고유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당당히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그 운동은 성공한 것이다. 아니, 그게 정말 과격한가? 보전깨, 삼일한 이런 어휘가 만연한 세상에서, 영문도 모른 채 된장녀나 김치녀 취급이나 받으며 조리돌림 당하는 세상에서, 여전히 축구 기사에 여성부 폐지하라는 멍청한 댓글이 베댓이 되는 세상에서 고작 그들이 하는 말 일부를 몇 명이 따라한 게 그렇게도 과격한가? 김구는 테러리스트인가? 니가 한국인이라고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넌 김구를 존경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김구가 독립운동가인 이유는 일본의 식민지배 자체가 부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위는 식민 관료 몇몇에게 응징하는 것 이상으로 정치적 표현이기도 하다. 약자가 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적 표현이다. 여기 조선인이 있다. 조선인의 의지는 너희의 의지와 다르다. 단지 우리에게 없는 것은 절대적인 무력일 뿐이다. 메갈리안이 테러리스트인가? 제발 균형감각좀 가지시길. 그들은 단 한 번도 정도 이상의 폭력을 동원한 적이 없다. 메갈리안은 단지 남성 위주의 언어관이라는 시스템의 빈틈을 드러냈을 뿐이다. 압도적인 언어와 실제 폭력에 똑같은 언어로 맞섰을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전까진 한 번도 페미니즘이 주류 담론으로 올라서본 적 없으면서 벌써 페미나치니 쉐미니즘이니 하는 비하 단어부터 유통되는 나라에서? 점잖은 페미니스트들이 점잖게 얘기하는 동안 그들을 꼴패미라고 후려치던 나라에서?

사회 전체로 봤을 때 무엇이 더 심각한 문제겠는가. 악의와 왜곡과 무자각적인 폭력이 판치는 여혐이 문제겠는가, 소수의 넷 안에 한정된 메갈리안이 문제겠는가. 정말로 당신이 정의를 생각한다면 어느 편에서 누구를 지지해야 하겠는가. 단순한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어느 편에 서야 하겠는가.

원래 이 글은 “균형 있게” 의의와 한계에 대해 쓰려고 했던 글이다. 그런데 의의 부분이 너무 길어지고 또 글을 쓰다 겪은 몇몇 광경을 보고 아직 한국 사회는 미러링의 한계를 논하기엔 미숙한 사회라는 것을 깨닫고 한계 부분은 차후로 미뤄둔다. 사실 귀찮은 게 제일 크긴 하다. 그래도 간단하게 그들의 폭력이 진짜 폭력이 되는 경우만 짚어보고 넘어가겠다.

미러링의 논리에는 항상 ‘선의의 피해자’ 논법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필연적이다. 나는 반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바로 이 피해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대의를 위해 나의 도덕성과 무엇보다도 미처 정밀하게 골라내지 못한 일부 남성의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논리다. 앞서 말했던 메갈리안 이전부터 페미니즘과 여성혐오 현상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해오던 남성이 바로 그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메갈의 주요 반론거리인 ‘중립충’에 그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가 만일 동지적인 의식을 가지고 메갈에 대한 비평적인 논평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메갈리안들이 신경을 써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가 느끼는 불편함은 누가 지지해줄 것인가? 마찬가지로 적대적인 무자각적 남성들이 그의 편이 되어줄 리는 없을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직접 공격을 받은 당사자들이다. 여기서는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설령 그가 마초이즘에 찌든 남성이고 여성혐오가 사회정의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자연인인 그에게 직접 가해진 비난에 대해서는 반론하거나 저항할 권리가 있다. 그는 자연인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악인도 개인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방어할 수 있다. 당연히 특정인이 지목되었다면 법적인 대응역시 가능하다.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명예를 관리할 권한은 그의 사상 여부에 관계없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위 문단에서 언급한 경우 또한 생각해보자. 만일 본인이 논리적으로 씹치, 한남충이라는 단어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그는 이미 그 비난에서 이야기하는 당사자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자신이 당한 모욕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항변할 수 있다. 최근 모 만화가가 집요한 공격을 받다가 메갈리안 몇 명을 고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내가 보기에 그가 남긴 작품은 논하기도 아까운 쓰레기다. 정밀한 비평조차 필요하지 않다. 그냥 쓰레기의 평가 포인트를 제시하고 빠르게 걸러내버려야 할 작품이다. 하지만 그게 작가 개인에 대한 공격이 될 경우 그에게는 얼마든지 법적 대응을 할 권리가 생겨난다. 그가 어떤 ‘모욕’을 고소할 생각인지는 난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애국자와 악당 사이에서 : 올바른 해석방법에 대하여 사회

사진출처 : 연합뉴스

이번 테러빙자법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의 거짓말을 믿는 사람은 순진해빠진 자라거나 종합판단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진실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난 내가 모든 진실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의 자리에 발이라도 디딜 수 있는지 걸러내는 것 정도는 이성 차원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터무니없는 모 댓글을 보라. 그는 내가 국정원을 믿지 못한다는 현상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주관이니 어쩌니 하며 은근슬쩍 물타기를 하려 한다. 하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면 보인다. 내 말은 국정원이 공적인 지위에서 과중한 권한을 배정받을 만큼 '신뢰도'가 있는가, 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내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 한 명의 믿음에 따라 국정원이 그것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공적인 문제고 국정원에게 그런 공적인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진심으로 테러 방지를 위해서는 그 법이 필요하다고 믿는 경우도 마찬가지다(위의 경우는 '왜 굳이 반대함?'이라는 태도에 가까운것 같다). 그건 본질을 호도하고 맥락을 흐리는 파렴치한 원론일 뿐이다. 테러방지법에 반대하다니요? 당신은 테러에 찬성하는 모양이군요! 아주 간단한 양자택일의 오류다. 저 양반들이 들고 있는 피켓을 보라. 저런 멍청한 개수작에 놀아나는 작자들이 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날 뿐이다.

자, 우리가 간단히 접할 수 있는 사실의 파편들을 모아보자.

1. 대통령은 근엄한 표정으로 그 법의 통과를 촉구했다. 이 법은 대통령이 의뢰한 법이고 새누리당은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 단 한 글자의 수정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2. 새누리당은 만장일치로 대통령의 뜻에 따랐다. 만장일치가 뭐가 나쁘냐는 식의 개소리도 있었다. 제발 사안을 사안별로 구분하자. 이번 경우는 합의에 의한 만장일치도 자기편에 수를 보태주기 위한 만장일치도 아니고 단지 예외를 용납하지 않는 절대적 충성일 뿐이다.

3. 국회법에 따르면 국회의장은 당적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 정의화 의장이 어느 편인지 안다. 그래도 정의화는 중립적으로 의정을 잘 이끌어와 야당의 존경도 많이 받아온 인물이라 평가된다. 하지만 그는 유신 이래로 처음으로 국가비상사태 핑계를 대며 법안을 직권상정했다. 인간의 지능을 가지고서 그걸 믿는 사람이 있는가? 인간의 양심을 가지고서 그 행위가 정당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4. 각종 독소조항에 대한 새누리당의 해명은 단 하나로 수렴한다. "국정원을 믿어주세요!" 따지고 보면 이 법의 실행주체인 국정원이 합리적인 의심을 통해 정도와 절차를 준수하며 임무 수행을 한다면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1명의 '대통령이 정해주는' 인권보호관이 있다고 견제장치가 마련돼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그 1명이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면야 국정원의 폭주는 견제되겠지. 맞지? 요약하자면, "아마도 국정원은 ★정도★를 잘 지킬 거야!" 그 순진무구함이란!

5. 누군가의 권한을 확대하면서 그에게 스스로의 권한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망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러지 않을 것이라 보는 근거는 간단하다. 그들은 예전에 안 그랬고, 지금 안 그러며, 안 그런다는 반성도 안 했다. 국정원은 21세기 들어서도 사찰과 각종 불법 행위를 거리낌없이 저지르며, 현행법으로도 국정원의 범죄를 처벌하기 어려우며(비밀주의와 국정원장의 절대적 보호 때문에), 그들은 야당 혹은 시민사회의 저항을 종북 좌파의 암약이라는 망상 하에 있다.

6. 기타 등등. MB가 장악한 공중파, 그리고 거대 친재벌 언론의 종편을 통해 의제가 장악되었고 그들은 입을 모아서 적법한 절차를 거쳐 무제한 토론을 하는 야당을 비난한다. 새누리당의 대응은 유치해 빠진것투성이다. 필리버스터를 도입한 새누리당이 헛소리를 하고 앉아 있다.

이 모든 파편을 종합해보자면 이 행위는 1. 대통령의 의지와 2. 신하들의 충성과 3. 위법적인 시도를 통해 4. 위험요소의 여지가 많은 법을 5. 스스로 신뢰를 증명 못한 대상에게 적용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남은 건 그 의도다. 여기서는 여러 가능세계를 상상해볼 수 있다. 이것은 상상의 영역이라는 말이다. 나는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해 보겠다. 첫째. 새누리당과 대통령과 종편은 테러로부터 나라를 수호하려는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서 이 올바름을 위해서는 다소간의 위법사항이나 반민주적 행태까지 감수하면서 하나로 뭉쳐 법안을 관철하려 하지만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기만 좋아하는 야당은 무제한 토론이라는 파행적인 방법을 써가며 정치 쇼를 벌이고 있을 뿐이다. 둘째. 그들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미디어법으로 티비를 장악하고, 노동법 개정으로 쉬운 해고와 비정규직의 시대가 열렸고, 역사교과서 장악으로 미래의 지지자를 양성하는 등 국가개조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번 개정은 그간 보수정권에 충성을 보여온 국정원에게 힘을 더 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첫째 가능세계에선 영원히 정의로운 애국 보수 세력대 악의 세력 야당이라는 동화적이고 판타지소설같은 대결구도가 그려진다. 둘째 가능세계에서의 보수세력은 전세계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악당일 뿐이다. 물론 개중에서 순진한 애국자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권력을 위해 야합했으며 그것은 본인들이 누리고 있는 다수로서의 권리를 충분히 누리는 것일 뿐이다. 야당은 그들에게 휘둘리기는 하지만 적어도 몇몇 의원들은 일관되게 정의롭고 이상적인 민주국가상을 제시하고 있다. 몇 시간, 심지어 열 시간이 넘어가는 의원들의 진솔한 고백을 품을 수 있는 세계는 아무래도 후자뿐인 듯하다.

어느 쪽이 그럴싸해 보이는가. 이거야 말로 흑백논리가 아니냐고? 내가 언제 이게 전부랬던가? 그저 가능 세계일 뿐이다:)

1 2 3 4 5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