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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favorite things] (1) 메종일각

My favorite things

 

장미에 맺힌 빗방울과 고양이의 수염. 밝은 놋쇠 솥과 따뜻한 털벙어리 장갑…… My favorite things의 가사에서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골라보았다. 목록을 고민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재료들이니까. 이 것들은 내 의식에 무의식에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나처럼 생각하고 지금의 나처럼 느끼는 나를 만들었다. 내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살아온 날들을 반추해보기 위해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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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번째. 메종일각 by 다카하시 루미코


※ 스포가 포함돼 있긴 하지만 루미코 월드의 기본 전제라고 할 수 있는 스포이니 대체로 무해합니다.


 

 

러브코미디의 신은 존재한다. 그 신은 여자다.

 

어딘가에서 떠도는 격언을 인용해 보았다. 여기다 남성향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싶지만 그러면 원본과 너무 멀어질 것 같아서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자. 90년대. 그때는 일본 문화 개방의 전조가 흐르는 시기였고 각종 일본발 해적 만화가 온 동네 초딩들 사이로 스며드는 시기였다. 그때의 분위기는 마치 세기말 같았다. 지존파니, 휴거니, 삼풍백화점이니, 성수대교니 하는 흉흉한 사건 사고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고, 그 화려한 라인업 사이에 변태 일본 만화도 끼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잠자는 부르마에게 팡팡을 하는 손오공, 꼬추를 내놓고서 코끼리 흉내를 내는 짱구, 그리고 물을 끼얹으면 여자로 변하는 데다 걸핏하면 아버지를 두들겨 패는 란마 등은 순진한 당대 한국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화적 자극이었나 보다.

 

나에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시기로 돌아가 당시 떠들어댔던 아주머니 단체라든가 기독교 단체 등은 란마의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을 인지했는가 확인해보고 싶다. 란마를 다시 본 것도 2000년대 이후고 그 작가가 여성이라는 것을 안 것도 그 이후였다. 작가의 성별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그린 장편 만화는 거의 모두 남성향 소년만화였기 때문이다. 90년대에는 소년향 소년향 만화의 구분이 엄격했다. 그때는 주간 만화잡지가 그래도 제법 팔렸고 잡지 성향에 따라 성별이 거의 정확히 나뉘었기 때문이다. 내 오랜 편견으로는 여성 작가는 턱이 뾰족하고 눈이 솔방울만한데다 체형은 무슨 에반게리온 같은 인종불명의 미소년 미소녀 그림을 그려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란마와 이누야샤를 그린 작가의 성별에 대해서는 난 한 순간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남자라고 전제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그냥 내가 인간인 것만큼이나 말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루미코의 전매 특허 심통난 표정.>   

 

내가 메종일각을 보게 된 것은 란마를 다시 접한 뒤로도 수년이 지나 성인이 된 뒤였다. 처음 본 것은 애니메이션이었다. 그 동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화수로 96화나 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애니메이션을 어째서 보려고 마음먹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하여간 이 작품을 처음 접하고나서 나는 이렇게 느꼈다. 이게 바로 개종이구나, 하고. 그야말로 나는 무장해제 상태였다. 이 작품은 문화예술이 나에게 가할 수 있는 감동의 임계점이 어디인지 알려주었다.

 

모든 대중문화는 불편함을 의식적으로 거세하고자 한다. 나는 그것을 조작적 안락함이라고 부른다. 조작적 안락함이 최대치에 이른 장르가 바로 일상물이다. 갈등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으며 추함도 없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미형 모에 캐릭터의 큰 굴곡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영원성이다. 어제와 같은 일상이 아무런 의외성 없이 오늘도 반복될 것 같은 영원함, 애정하는 캐릭터가 결코 나이를 먹을 것 같지 않은 그 영원함 말이다. 만화에서 현실성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그만큼 만화 내에서 인위적인 조작이 많이 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조작이 많아진다면 극은 점점 안정적이게 되고 그것을 보면서 가슴 두드릴 일은 없게 되며 가슴을 졸이며 몰입할 일도 없어지게 된다. 위기는 작가가 마련한 안전한 장치를 통해 해소되며 갈등은 그리 심각하지 않게 마무리된다. 반대로, 조작적인 비극을 부여하는 경우 역시 있다. 한국의 막장드라마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뜬금없이 사람이 차에 치이거나 병에 걸리는 그런 전개 말이다. 문제는 불편함과 안락함 사이의 균형이다. 비록 어느 쪽의 극단이라 하더라도 그 안락함, 불편함이 설득력 있다면 그 작품은 장르 내부에서 최적의 효과를 거둘 것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독자는 그것을 보며 그 세계관이 크게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 제시되는 사건과 갈등은 끊임없이 현실적인 고민을 상기시킨다. 갈등은 위기를 겪고 사건은 파국으로 치닫거나 예상치 못한 반전을 맞아 해소된다. 보통 범 취향의 영화라든가 베스트셀러 소설이 대개 이런 식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조금 더 판타지를 보장해주는 쪽을 생각해보자. 독자는 분명히 안락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성의 판타지가 반영된 히로인이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평범하고 여러모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자 주인공에게 여러 미소녀가 알아서 달라붙는다. 하지만 몹시도 설득력 있고 진솔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판타지와 현실이 최적의 시너지를 얻는 이상적 비율로 조합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작품이 바로 메종일각이었다. 모든 러브코미디의 최종 목표가 히로인과 이어지는 것이라면 이 오토나시 쿄코는 가히 끝판왕급 난이도의 상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라이벌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쿄코는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작에는 없는 애니만의 오리지날 대사가 있다. “죽은 사람은 무적이다.” 죽은 사람과는 애초에 라이벌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쿄코의 남편이었던 소이치로의 얼굴은 작품 끝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데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은 고다이 역시 마찬가지다. 잡히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유령같은 존재를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해야만 하는 대 위기에 빠지고 만 것이다.


<루미코의 만화는 템포가 빠르다. 한 컷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는 만화가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러한 컷 연출법을 애니메이션화할 때에는 컷 사이의 행간 해석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애니메이션은 시간의 연속체니까. 그 사이를 어떻게 메우느냐가 성패의 갈림길. 최악의 경우는 원피스같은 연재와 동시에 방영되는 저예산 애니들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작품 내 상황과 인물 배치 등을 조절하고 오리지날 씬을 삽입함으로써 컷 사이를 잘 채워주고 있다. 고다이의 이 독백은 매우 중요하다. 본격적인 이야기 전개를 알리는 선전포고와도 같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만 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내가 루미코를 러브코미디의 신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작품이 러브코미디의 전형을 확립했다는 점 외에도(우유부단한 주인공, 하렘과 역하렘이 얽힌 갈등구조, 핵심 인물들 사이의 오해와 착각 그리고 그들과 독자 및 주변 인물들이 아는 진상의 차이 등등) 그 끝판왕을 깨는 과정이 아름다우리만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고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쿄코는 츤데레라고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사실 츤데레의 전형은 아니다. 차라리 한국적인 표현인 새침데기가 그를 설명하기에 더 적절한 표현 같다. 평소에는 누구에게든 친절하고 상냥하고 체면 차리지만(제페니즈 스마일을 생각해보자) 가족 앞에서라든가 아니면 질투할 때에는 줄곧 심통을 부리고 험한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가 선사하는 갭 모에는 이런 부분이다. 사실 그는 이미 80년대에도 스스로 구닥다리라고 말할 만큼 시대에 뒤떨어진 현모양처적인 여성이다. 맨션 관리인을 하고 있지만 그건 시댁에서 준 일자리일 뿐이고 본인은 아무런 경제적 능력이 없다. 그를 둘러싼 남성들은 항상 네가 쿄코 씨를 먹여 살릴 수 있느냐는 문제로 다툰다. 그는 다분히 전통적인 남성관을 반영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결코 남성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현실의 제약 속에서 항상 욕망의 주체라는 점을 내비친다. 그 점이 현대 남성향 만화/애니와의 결정적인 차이다. 쿄코는 전통적 가부장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연애 자체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영웅이라뇨. 전 그저 망치를 든 요물일 뿐이에요=_= 루미코의 작품에는 이렇게 요괴화 된 노인이 종종 등장한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니시오이신의 <고양이 이야기 백>은 그 이전 시리즈와는 달리 하네카와 츠바사가 화자로 전면 등장한다. 그는 전편의 화자인 아라라기 코요미를 짝사랑하고 있었고, 아라라기 역시 그를 좋아했지만 두 사람은 별것 아닌 이유로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나가게 된다. 이후 아라라기는 센조가하라와 사귀가 된다. 이 작품에 벡델 테스트를 한번 적용해볼까? 벡델 테스트는 영화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 알아보려고 만들어본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요건은 다음과 같다. 1.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2명 이상인가. 2. 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3. 그 대화가 남성에 대한 것 이외의 것인가. 이 간단한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영화가 부지기수, 아니 대다수다. 이 테스트의 의의에 대해서는 별도로 얘기해보도록 하자. <>은 어떤가. 여기서는 아라라기가 단 한 장면 등장한다. 그 외의 모든 인물은, 아버지를 제외하면, 여성 캐릭터다. 당연히 대화 내용은 아라라기에 대한 것 이외의 것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작품의 여성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네버. 이 작품은 벡델 테스트의 맹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모든 여성은 아라라기에게 서사적으로 종속돼 있다. 기본적으로 이 시리즈는 불행한 소녀가 주인공에 의해 구원받는 이이기. 소녀가 괴이와 연루되고, 아라라기는 온갖 수를 동원해서 그를 구원한다. <>에서는 과거 아라라기에게 구원받은 여자들이 잔영처럼 등장한다. 아라라기는 잠시 종적을 감춘 상황이지만 거의 모든 곳에서의 대화는 그의 부재를 뼈대로 형성된다. 아라라기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이미 서사는 그의 존재를 전제하며 모든 여성 캐릭터들은 마치 아라라기의 형상대로 틀을 만들듯이 자신의 위치를 그의 주변적인 것으로 한정한다. 벡델 테스트의 3번 항목, 남자에 대한 것 이외의 대화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라라기에 대한 대화의 비중이 문제가 아니라 이 상황을 아라라기의 부재로 규정짓는 나머지 캐릭터들의 포지션이 문제다. 그리고 종국에는 왕의 귀환이 이뤄진다. 마치 수백 페이지의 예언과 선지자들의 찬양 끝에 메시아가 강림하는 것처럼. 하네카와는 불행하다. 그것은 그의 가정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택받지 못한 비련의 여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판에서는 그의 모놀로그 사이에 극 내용과 상관없는 이미지씬이 연출되는데 그것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홀로 세계여행을 다니는 하네카와의 모습이다. 비록 직접적으로 밝힌 바는 아니지만, ‘남자에게 선택받지 못한 서브 히로인이 결국 다른 남자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홀로 세상을 떠도는그림이 충분히 그려진다.


   <만일 쿄코는 남편을 잃은 비련의 여주인공이고 고다이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찾고 마침내 행복하게 되었다. 따위의 주제의식을 띠고 있었다면 난 이 글을 안 썼을 것이다.>

 

소위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여성의 가치와 존재 목적이 남성과 이뤄지는 데에 있는 플롯에서 <이야기 시리즈>는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이런 패턴은 신데렐라보다는 서브컬쳐 논리로 접근해야 옳다. 상당수의 오타쿠 대상 스토리가 이런 판타지를 반영하고 있다. 신데렐라가 왕자님에게 귀속되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을 반영했다면, 오타쿠 물에서는 그러한 여성 캐릭터를 지배하고자 하는 남성의 욕망에 주목한다. 주의하시길. 여기서 욕망의 주체는 캐릭터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다. 주인공 남자 캐릭터는 오히려 욕망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그것은 교태다. 자신의 욕망을 숨김으로써, 혹은 자각하지 못함으로써 상대 여성 캐릭터의 욕망은 부추김되고, 이른바 플래그가 꽂히며 여성 캐릭터는 주인공에게 종속된다. 말하자면 애가 닳고 얼굴을 붉히는 묘사를 통해 데레상태가 된다. 만화/애니의 하렘 구조는 대개 이런 식으로 형성된다. 주인공은 히로인들의 욕망을 주재하는 의 자리에 오르고 독자는 히로인들의 플래그를 대리 수집한다. 이것은 작가와 독자의 은밀한 밀약이다.

 

이런 밀약이, 메종일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트레이트다. 주인공 고다이는 주민들의 등쌀에 더는 재수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을 것 같아 일각관(정발판은 영 번역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처음에는 한일맨션이라 했다가 나중엔 도레미 하우스로 바뀐다. 난 어지간하면 국내 정식 발매 매체를 기초 텍스트로 삼지만, 이 작품은 굳이 원어와 관습적 명칭을 따르도록 하겠다)을 떠나려 하지만, 새로 들어온 관리인을 보고 곧바로 결정을 철회할 만큼 얼빠진 녀석이다. 그는 자기 마음을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노출시켜버린다. 술을 마시고 동네방네 고함을 지르며 고백을 해버린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기억 못하지만, 어차피 그가 쿄코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주변사람들에게 기정사실이다. 일각관 주민들은 내도록 그 사실을 약점 삼아 골탕 먹인다.


<인물들의 전통적인 남녀관에 대해선... 노파심에 자꾸 언급하려 하는데 자제. 자제. 혹시 이해 안 가면 따로 질문하기를.>   

 

그렇다면 쿄코는 어쩌다 고다이에게 마음을 주게 된 걸까. 이 과정이 작품 전 분량에 걸쳐서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전 남편 소이치로를 잃은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쿄코의 부모는 쿄코를 하루빨리 재혼시키려 한다. 하지만 쿄코는 부모의 말에 마치 중학생처럼 반항한다. 고다이에게 이미 마음이 기운 뒤에도 쿄코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는 스스로 밝힌다. 이대로 다른 사람을 만나면 소이치로를 사랑했던 자신의 마음은 가짜가 될지도 모르니까. 작품 내도록 쿄코는 이 속박과 싸운다. 고다이는 도저히 쓰러트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보스에게 끊임없이 도전한다. 언제나 그들은 오해를 달고 다니고 별것 아닌 것에 질투한다. 일본 러브코미디가 대개 학창시절의 한 순간을 그리고 있는 데에 비해, 이 작품은 재수생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의 긴 시간을 다룬다. 그들의 티격태격하는 일상은 크리스마스를 몇 번을 보내는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녹아든다.

 

고다이가 획득한 것은 플래그 따위가 아니다. 고다이는 이 연애 게임에서 한 번도 주체적인 위치에 선 적이 없다. 비록 고다이 주변에는 왠지 모르게 다른 여성들이 꼬이고 쿄코는 질투의 화신 같은 질투를 보이며 사실상 이것이 쿄코가 갈등하는 계기가 되지만, 쿄코는 결코 고다이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고민을 하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고다이를 선택한다. 비록 연애가 서사의 최종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애가 인물의 권력관계를 좌우하지 않는다. 당연히 플래그의 대리수령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고다이와 쿄코는 언제나 상호작용하며, 두 사람의 거리는 항상 두 사람이 얽힌 상황에 따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유동적으로 변한다. 때로는 서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그저 아무런 전진이나 후퇴 없이 각자의 생활을 하기도 한다. 설령 쿄코가 고전적인 가부장적 여성상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이 문제와는 상관없다. 그의 가부장적 태도는 단지 시대상에 따른 캐릭터의 성향일 뿐, 그 캐릭터가 나타내는 함의와는 무관하다. 그의 감정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처음에는 관심이었다. 괴롭힘 받는 고다이를 걱정하는 보육원 교사와 같은 관심 내지는 동정이었다. 그는 고다이가 칠칠맞게 흘리고 만 자신을 향한 마음을 일상적으로 접한다. 그러다가 고다이에게 자꾸만 여자들이 달라붙고 질투를 하게 된다. 저 사람의 진심은 무얼까 의심하고, 갈등한다. 고다이는 자꾸만 신뢰를 잃는 짓을 하고 둘은 티격태격한다. 사소한 갈등은 결국 오해였음이 밝혀진다. 라이벌이 등장하여 이따금 고다이는 적극적 어필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하지 못하고 소이치로에 대한 마음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과정 하나하나가 15권에 걸친 에피소드들을 통해 진득하게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진실성은 여기서 나온다. 밀당할 줄 모르는 주인공. 그는 욕망의 주재자로서의 주인공, 히로인을 감정적으로 종속시키기 위한 주인공이 아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과 상호작용하는 히로인은 데레로 규정될 수 있는 히로인이 아니다. 이들은 누군가의 대상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인간이다. 구체적인 공간에서 구체적인 시간을 살아가고 나이를 먹는 주체다.


<루미코는 끊임없이 작중 인물들에게 현실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취직을 못한 고다이는 이렇게 삐끼 짓이라도 하며 바둥대야 한다. 그들이 사는 곳은 일본의 구체적인 어느 땅, 어느 시대이다. 고다이에게 있어서 생활의 문제는 곧 사랑의 문제다. 스토리는 결코 연애로 환원되지 않는다. 설령 이후에 후일담에서 이들이 이혼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까지 감내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결코 완결나지 않는다.>    

 

이러한 설득력, 그리고 거기에 가미된 판타지의 조화. 남성향 판타지를 대변하는 이 히로인에게 전에 없고 이후에도 없을 개성과 생명력이 부여된 것은 루미코가 남성이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 독자는 이 작품을 보고서도 쿄코를 단지 소비할 여캐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쿄코는 어느 히로인과 비교하더라도 주체적이고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 러브스토리가 아름다운 이유다. 대체 사랑이 무얼까. 그 많은 러브스토리에서 연인들은 어째서 서로에게 사랑에 빠질까. 내가 본 작품 대부분에서 그 이유는 명확히 그리지 않는다. 가장 많은 사유는 첫눈에 빠졌다는 것. , 그게 가장 낭만적인 이유일 것이다. 사랑에 구차하게 이것저것 갖다 붙이면 없어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그 없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진실돼 보일 수도 있다. 메종일각에서 보여주는 가장 큰 정서는 이게 아닐까. 사랑은 서로의 인생을 감내하는 것. 고다이는 소이치로의 무덤에서 말한다. “당신은 이미 쿄코씨의 일부니까요. 하지만 저, 최선을 다하겠어요. 처음 만난 그 날 부터 쿄코씨의 마음 속엔 당신이 있었고, 저는 그런 쿄코씨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을 포함해서, 쿄코씨를 안겠습니다.” 재수생에서부터 취업 재수생까지. 그 실질적 기간 동안 초등학생이었던 이쿠코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게 되었다. 당연히 히로인도 나이를 먹었다. 그간 벌어진 숱한 에피소드를 나는 엔딩의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그들은 서로를 충분히 이해했고, 충분히 원했다. 그야말로 해피엔딩의 가치가 있다. 비록 루믹 월드에서 예견된 엔딩이지만 나는 그들의 결말을 목격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은 내 생애 최고의 러브코미디다.

 

만화판은 총 15, 애니판은 TVA 96, 두 편의 극장판, 2부짜리 드라마판이 있다. 만화판은 루미코의 만화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 애니판은 아침 햇살이 한가로이 내리쬐는 듯한 평화로운 일상과 옛스런 향취를 고의로 자극하는 것 같은 편집, 시마모토 스미의 청아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각각 섭렵할 필요가 있다. 만화 치고는 길지 않은 편수긴 하지만 TVA판은 그 에피소드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에 화수가 매우 길어졌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서 도전해보길. 정발판은 번역이 문제지만 보는 데 지장은 없다. 종종 중고 매물이 보이긴 하는데 난 수년 째 완전판으로 재발매하기를 기다리느라 애써 외면하는 중이다. 제발 내달라고! 완전판 발매를 기다리는 사람 한 트럭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이 글을 읽은 당신은 메종일각을 봐야 한다.


배트맨 대 슈퍼맨을 쉴드쳐보자. 영상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2016)

스포포함!!!!

이 영화는 정확히 <맨 오브 스틸>(2013)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다. 아예 조드의 매트로폴리스 침공사건에서부터 사건이 시작되며 배트맨의 기본 동기는 여러 군데에서 알려진 바대로 거기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슈퍼맨의 심리 묘사를 맨 오브 스틸에 밀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잠시만 맨 오브 스틸(이하 맨옵스)을 복습해보기로 하자.

아서, 아니 클라크 빼박, 아니 그냥 캔트는 올바른 아버지로부터 정말 올바른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삼촌의 유언을 가슴에 새기고 그것을 시리즈 전체의 주제의식으로 발전시키는 기특한 피터 파커처럼, 그는 올바른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준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하는 말임. 클라크의 아버지는 말한다. 너에게 그런 힘이 주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상이 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나서지 말거라. 그 말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토네이도 목숨을 버린다. 클라크는 아버지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고개를 젓는다. 클라크는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 그가 아버지를 떠나보내면서까지 지키려 한 아버지의 말이 어떻게 인생 전체에 걸쳐 영향을 끼쳤을 지 상상해 보시길. 그의 선에 대한 부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렇게 형성된 사고 프로세스는 두 영화 전체를 아우른다.

말하자면 그의 선행은 자기 힘에 대한 책임이고 소명의식이고 정언명령이다. 거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다. 선을 구성하는 복잡한 양상을 고민하지도 않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으며 의심하지도 않는다. 조드는 엄밀히 말해서는 슈퍼 히어로 도상학적인 빌런이 아니다. 그는 크립톤 행성을 되살린다는 ‘대의’를 통해 행동하는 인물이다. 인류와 조드 일당의 입장은 선악으로 나눌 수 없다.

조드는 말한다. “내가 태어난 유일한 목적은 크립톤을 지키는 것이다. 내 행동이 아무리 폭력적이고 잔인할지라도, 그것은 내 사람들의 큰 좋음(greater good)을 위한 것이다.” 잠시 상기. 크립톤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가 사회에서 맡을 역할과 능력이 유전적으로 정해진다고 한다. 조드는 그렇게 태어난 전사 계급이다. 이 대사에서 greater good을 정식 극장판에서는 뭐라고 번역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이 외계인들의 생김새나 사회구조를 통해 미루어 볼 때, 이 말의 고전철학적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플라톤식 기능적 정명사회가 떠오르지 않는가!). 고대 그리스어 아가톤agathon은 영어로는 good이라고 번역되고 이는 한국에서는 ‘선’이라 번역되다가 최근에는 ‘좋음’, ‘탁월함’으로 번역되는 추세다. 왜냐하면 이것을 ‘선’이라 번역할 시에는 의미상의 오해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동양적 전통에서 선은 다분히 도덕적 의미를 지닌 반면, 고대인이 말한 아가톤은 도덕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탁월함’ 목적 혹은 결과로서의 ‘좋음’을 뜻한다. 목수가 망치질 잘 하고 정치인이 말 잘하고 뭐 이런 거.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조드의 말은 ‘크립톤인의 생존’ 내지는 ‘복리’에 가까운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의나 선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서로 총구를 겨눈 상태에서 누가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 네가 죽냐 내가 죽냐의 문제에 더 가깝다는 뜻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맨옵스에서 클라크의 선택은 정의의 문제와 동떨어져 있다. 그에게 조드와 싸울것인가 말것인가의 문제는 단지 크립톤을 선택할 것인가 인류를 선택할 것인가, 혹은 결정론적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 자유의지를 선택할 것인가에 국한되고 만다. 그는 얼떨결에 영웅이 되고 말았지만 이 시점에서 그는 영웅이 아니었다. 초월적인 의지를 가지고 어느 종족의 생존이 나을까 저울질하는 존재. 그에게 영웅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여준다면, ‘신’ 말고 다른 표현이 있을까?

그 신이 이번 작품에서 추락하고 만다. 바로 다름아닌 인간에 의해서. 배트맨은 심사가 단단히 꼬여 있었다. 이건 마치 팀 버튼의 배트맨을 보는 것 같다. 박쥐놀이를 시작한지 20년이 지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했다. 그가 슈퍼맨을 보는 시선은 명백히 질투다. 그가 슈퍼맨을 적대할 이유가 있을까? 메트로폴리스가 파괴돼서? 글쎄. 어린애도 슈퍼맨 이전에 조드가 먼저 난리를 쳤다는 것을 알지 않겠는가. 그는 우선 슈퍼맨을 믿지 못한다. 그 까닭은 자신이 그와 동일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 세계관에서 배트맨은 악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살인까지 거리끼지 않으며 낙인까지 찍어댄다. 낙인도 가벼이 넘어갈 설정이 아니다. 공공선과 사적인 선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던 베일 브루스와 달리 그는 더욱 독단적이고 더욱 위법적이다. 클라크가 수집한 기사들에 따르면 배트맨은 이전 영화들에서보다 더욱 신뢰받지 못하는 존재다. 정당하지 못한 힘을 지닌 자가 다른 힘을 가진 자를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불신은 원망의 감정으로 옮겨간다. 이 두사람의 상태는 짝패 상태에 있다. 하지만 배트맨 쪽이 더 구차하다. 그는 슈퍼맨을 불러들이면서 말한다. “네 부모는 너에게 무엇을 가르쳤지? 난 없어!” 이걸 보라. 명백한 <배트맨>(1989)에서의 배트맨의 재림이 아닌가. 조커에게 트라우마의 원인을 전가하는 그 비굴한 녀석 말이다.

렉스 루터가 왜 슈퍼맨을 미워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신 행세를 하는 쫄쫄이 녀석이 눈꼴시렵기 때문일까?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작중에선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새로운 렉스 루터고 꽤나 근사한 캐릭터지만 딱히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굳이 격을 따지자면 <배트맨 포에버>(1995)의 리들러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리들러는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앙금이라도 있었지. 감독이 주목한 것은 이 신을 추락시키는 과정 자체였던 것 같다. 그나마도 명쾌하지 않아서 문제지만. 여하튼 맥락은 보인다. 이 영화에서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기소당한 신’이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커다란 힘을 지닌 존재를 우리는 승인해야 하는가. 렉스 루터는 슈퍼맨을 청문회에 출석시키는 데에 성공하고 그 자리를 폭파시켜 범죄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그리고 본래는 직접 하려던 모양이지만 마침 배트맨이 크립토나이트를 훔쳐간 김에 배트맨을 이용해 슈퍼맨을 잡으려 한다. 혐의를 받은 슈퍼맨이 배트맨에 의해 살해당한다면 신은 그 지위를 잃게 되는 것이다. 슈퍼맨은 때때로 인간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초월자, 즉, ‘불안’을 가져오는 자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동시에 ‘인간’에게 살해당한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 증명되는 셈이니까. 그래서 슈퍼맨에게 말하지 않는가. “넌 약하다”고.(이때의 정확한 대사 아는 분 제보좀. 핵심이 되는 대사라 생각하고 기억하려 하다가 휘발…ㅜ)

기소당한 신. 그는 신을 자처한 적도 없으며 영웅의식을 보인 적도(그의 코스튬은 단지 크립톤의 유니폼이었다!), 대의를 추구한 적도 없다. 그의 선행은 어떤 조건도 없는 그의 초자아의 발현일 뿐이다. 그를 신의 자리에 위치지은 것은 단지 상황과(조드랑 관련된) 인간의 불신 때문이었다. 작품의 원제가 Batman V Superman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VS.가 아니라 V다. 이것이 무엇의 약자인지, 해외 언론이나 인터뷰에서 밝힌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성실함이 부족한 관계로 영화 내용을 통해서만 보자면, 그것은 신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말한 게 아닐까 싶다. 배트맨이 인간을 대표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 해석은 조금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 배트맨은 멋대로 질투하고 멋대로 단죄한다. 그리고 그게 인간이 아닌가. 여기서도 배트맨은 영웅이 아니다. 기계적이리만큼 집요한 영웅서사였던 놀란 3부작에서 다시 팀 버튼의 배트맨으로 돌아가버린 셈이다.(두 배트맨의 차이에 대해서는 내 이전 포스트 참조) 루터가 말한 대로다. 이건 인간 대 신의 싸움이다. 영웅 대 신도 아니고 영웅 대 영웅도 아니다. 요약하자면 질투심에 불타는 한 인간이 악당의 계략에 넘어가 신과 맞짱 뜨는 이야기. 이게 이 영화의 가장 큰 골자다.

슈퍼맨은 런닝타임 내도록 소외된다. 루이스 앞에서 징징대던 광경을 떠올려보자. 그는 슈퍼맨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캔자스의 클라크이기를 원한다. 슈퍼맨은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일 뿐이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청문회 출석에 응해 화를 자초한다. 이 장면이 말하는 놀라운 서사논리가 보이지 않는가! 그 상원의원의 연설문을 떠올려보라. 그는 민주주의는 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결코 일상적인 청문회 장면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런닝타임 내내 시간에 쫓겨 허둥대는 연출을 보라! 그런 한가로운 장면이 들어갈 틈이 있겠는가). 여기서 감독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곳은 공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공적인 공간이다. 그런데 여기에 가장 사적인 존재가 들어와 있다. 초자아는 결코 상징화될수 없다. 그러니까, 개인의 선의는 결코 제도를 통해 검증할 수 없다. 슈퍼맨은 그러한 점에서 철저히 인간들에게 소외된다. 슈퍼맨이 마지막에게 한 대사를 보자. “내겐 네가 세계야.” 그대들은 이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가? 세계로부터 유린된 개인은 세계로 치환한 한 대상에게 몰입한다. 내가 희생하는 이유는 대의 따위가 아니라 단지 사랑하는 너를 지키기 위해서다. 결국 그는 개인으로서 죽고 미국은 그의 빈 관을 들고서 예포를 쏜다. 그래도 그 국가적 예우 장면이 슈퍼맨이라는 기표를 공적인 세계의 영웅으로 편입시켜준 게 아니냐고? 네버. 데일리 플랜트 국장의 태도를 살펴보자. 그는 판매부수를 위해 헤드라인을 멋대로 정하는 인물이다. 슈퍼맨의 부고는 데일리 플랜트 지면을 통해 알려진다. 그가 유도하는 것은 즉각적인 이슈일 뿐, 시민들의 애도를 반영하는 게 아니다. 장례식 장면 역시 그 어떤 사회적인 메시지도 담지 않았다. 하비 덴트의 죽음을 기리며 하비 덴트 법의 의의를 논하던 <다크나이트 라이즈>(2012)에서의 추도식 장면과 비교해보자. 만일 그렇게 되려면 적어도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하다못해 데일리 플랜트 국장이 나와서 슈퍼맨은 우리의 친구였다든지 하고 지껄이는 식의 연출을 넣어줬어야 한다. 영화에서 그의 장례식은 의장과 고향에서의 쓸쓸한 장례식을 교차해 보여줄 뿐이었다. 그는 개인으로서 죽었다.

배트맨과 슈퍼맨의 화해 말이다. 여기서부터 단순한 액션영화로 바뀌긴 했는데 아마도 많은 사람이 여기에 의아함을 느낄 것이라 생각한다. 화해하는 논리야 부족함이 없지만 문제는 서사 자체다. 이 장면이 어색해 보이는 까닭은 위와 같은 인간 대 신의 대결과 소외라는 심리 서사에서 갑자기 공공의 적을 물리치는 우지끈 쾅광 하는 이야기로 흘러갔기 때문이지, 거기에 개연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지나치게 성급하고 너무 많은 것을 우겨넣으려 했다. 그리고 연출 자체가 섬세하지도 못했다. 어떤 영화의 패인을 논할 때 시나리오와 감독의 책임을 놓고 보자면 난 시나리오 쪽에 한표를 주련다. 장황한 원작을 군더더기 없는 한 편의 영화에 쑤셔넣었던 <왓치맨>(2009)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난 왓치맨을 누가 만들어도 그보다 나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빼곡한 서사의 밀도에 질식하거나, 아니면 아예 몇 부작으로 장황하게 만들거나. 그러니까, 원작의 재현을 지상과제로 삼은 영화 중에서 말이다.

결론은 잭 스나이더가 주화입마에 빠졌다. 이거.

위플래쉬(2014) 영상

연속으로 ebs영화 특집. <위플래쉬>를 봤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듀나의 칼럼을 먼저 봤다. 그러니까 개봉 당시의 일이다. 제목은 <위플래쉬, 한국에서 유달리 성공한 진짜 이유>. 난 영화를 안 봤고 듀나는 대체로 맞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비로소 영화를 보고 나니 그의 평이 그대로 머리속에 떠오르더라.


듀나는 그 글에서 이 영화가 해석되는 세 가지 방식을 말했다. 다음은 인용이다. "(1) 폭력적이고 위험한 선생과 그에 못지 않게 위험한 정신상태의 학생이 벌이는 대결을 다룬 드라마틱한 영화, (2) 온갖 방법을 동원해 제자의 가능성을 끌어내려는 스승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 (3) 척 봐도 사이코인 놈을 스승이라고 치켜올리는 나쁜 영화. (1)은 감독의 의도이다. (2), (3)은 우리가 이 상황을 한국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내가 떠올린 의문은 이것이다. 아니, 이 영화를 (3)은 몰라도 (2)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놀랍게도 잠깐의 검색만으로 난 숱한 네티즌의 그러한 감상평을 접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이가 없다.


영화에는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다. 그 중 무엇을 취사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에 달렸다. 그것이 해석이 갈라지는 주요한 이유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자주 사용한 롱테이크 기법을 논할 수도 있겠고 아들을 지켜보고 지지해주는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영화의 주제라고 말한다면 곤란하다. 모든 필름에는 의도가 담긴다. 해석의 자유는 무한대로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석이란 그 쇼트와 씬과 조명과 연기와 대사 등등을 한데 아우르는 종합 판단이다. 화석과 지층 등에 비추어 우리가 목격한 적 없는 선사시대 지질사를 추적하는 것과 같다. 특히나 잘 만들어진 영화의 경우는 그 단서가 매우 뚜렷하여 영화 보는 훈련이 된 사람들 눈에는 대체적으로 유사한 학설이 세워지게 마련이다.


(2) 해석을 지지하는 글들을 보면 대체로 앤드류의 정신상태를 간과한다. 그는 스승 못지 않은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인다. 친척과의 대화 씬에서의 삐딱함을 보라. 비록 그가 그 집단에서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자식 자랑에 여념이 없는 그들 대화에 끼어들어 공격적으로 나온 건 그가 먼저다. 선후 관계가 어찌됐든 그는 성공에 대한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플렛처가 처음 기선제압을 할 때 말하지 않았는가. "넌 왕따"라고. 앤드류가 기껏 만난 여자친구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라.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것은 전형적으로 상대와의 대화 맥락을 읽지 못하는 녀석의 대화다. 결정적인 장면은 그가 플렛처를 기소하기 거부한 부분이다. 앤드류의 목적은 오로지 최고가 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그의 사고는 이런 논리를 띠게 된다. '내 목적을 위해서는 나를 학대해도 좋다.' 당연히 여기엔 스승의 목적을 위해 희생된 션에 대한 의도적인 무사유가 포함돼 있다. 션을 죽게 하고서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며 눈물 흘린 스승에 대한 무사유 역시 포함돼 있다. 즉, 우리가 여기서 봐야 할 것은 그의 '열정'이 아닌 '비틀린' 열정이다.

 

플렛처가 앤드류의 집념을 읽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의도가 제2의 찰리 파커를 만들어내려는 것이었다는 것또한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정상적인 열정을 가진 두 사람의 대결이지 스승과 제자의 초월에 대한 열정 따위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가 내도록 말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스파크 자체이지 스파크로 인한 어떤 결과가 아니다. 이게 다 교육이었다능, 하는 플렛처의 인간미 어린 변명과 마지막 씬에서의 함정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그들이 이전에 밴드에서의 월권 문제로 싸웠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교통사고가 나 부상을 입었음에도 자리에 앉으려는 광기와 피흘리는 제자를 방치하고 그것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 스승을 간과한다. 이러한 연출은 그들의 갈등이 통제 가능한 한 수준을 벗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마치 팀 버튼 영화의 배트맨과 빌런처럼 서로 꼬일 대로 꼬인 심사를 서로에게 분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피날레는? 비틀린 심벌을 잡아주고 폭주하는 드럼 솔로를 받아들여 밴드를 마침내 하나로 만든 지휘는? 이해 안 될 게 뭐 있나? 둘이 클럽에서 만났을 때, 그때가 화해 시점이 아니었을 뿐이다. 두 사람의 대결은 마침내 음악적인 황홀경에 이르게 되고 그 순간에 이르러서 비로소 잠깐의 화해가 이뤄졌을 뿐이다. 이 설명을 증명하는 증거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플렛처는 이 무대에서 망칠 경우 음악계에서 영원히 매장된다는 협박을 했었으며 앤드류가 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할 때에도 명백히 당황한다. 그 장면은 두 사람의 마지막 오기이자 대결이었을 뿐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스승과 제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마인부우의 위협 속에서도 대결을 벌이던 베지터와 카카로트의 관계에 더 가깝다. 포레스트 검프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성적 절제가 없는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이다. 내가 이 연주로 널 납득시켜 보겠어. 넌 결코 내 만족에 다다를 수 없어. 물론 둘 중 더 이상한 쪽은 플렛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지 않는다. 충족이란 끝을 의미하니까. 그는 단지 학생들을 불가능한 이상향으로 몰아붙이는 가학성애자일 뿐이다. 그에게 집착하는 제자는? 말할 필요도 없다.


포레스트 검프(1994) 영상

설특선 영화로 EBS에서 방영한 포레스트 검프를 보았다. EBS야 원래 평소에도 명화 방영을 해주는 탓에 딱히 설 특선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설하면 안방극장이 아니겠는가.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리콜되는 영화에는 역시 이유가 있는것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안 보고 있었다니 내가 다 한심해지네.


하지만 아무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에겐 감흥이 반감될지도. 이 영화는 포레스트 검프의 인생을 60년대부터의 미국사와 교차시켜 보여준다. 앨비스 프레슬리, 케네디,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 존슨, 닉슨, 핑퐁외교, 워터게이트 등 굵직한 사건들이 직간접적으로 포레스트와 연결된다. 하지만 이 정치적 이슈는 영화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들은 SF적인 가정조차 아니다. 주인공 포레스트는 말하자면 약간 모자란 사람이다. 그는 자신과 사람들의 복잡한 상관관계나 역학관계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입버릇처럼 '우리 엄마가 말하기를' 입에 달고 다닌다. 그의 행동지침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정언명령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도 단서도 의심도 없으며 그는 오직 엄마가 입력해준 원칙에만 충실할 뿐이...다. 그가 베트남 전쟁에서 살아남은 계기역시 그것이었다. 제니는 그에게 달리라고 말했고 그는 달렸을 뿐이다. 그리고 병영에서 만난 친구 바바와의 약속을 지켰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의 행위는 그가 알지 못하는 상징적 층위를 획득한다. 그는 풋볼 스타가 됐고 전쟁영웅이 됐고 반전시위대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으며 핑퐁외교의 상징이 됐다. 그가 이러한 중층의 아이콘이 돼가는데도 그는 그 의미를 거의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달릴 뿐인데도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것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문득 피곤해져서 3년 몇 개월 간의 달리기를 끝내기로 했을 때 그를 뒤따르던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우리는 어떡해야 되죠?"


바로 여기에 영화의 핵심이 있다. 이 영화는 가장 정치적인 이슈를 거론하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도 탈정치적인 영화다. 영화가 거론하는 무수한 실제 우리가 기억하는 사회적 기표는 포레스트 검프 위에서 항상 겉돈다. 단지 포레스트는 맹목적인 자기 원리를 지켰을 뿐이다. 심지어 그에게는 그것을 회의하는 이성조차 약하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원피스 류 소년만화의 주인공을 겹쳐 보았다. 대의라든가 음모 따위는 모르고 오직 눈앞의 감정에만 충실한 열혈 주인공. 모든 대의를 해체하는 그 막무가내 말이다. 그 우직함에서 로망이 나온다. 그 때문에 포레스트의 사랑, 제니에 대한 사랑은 더욱 순수해 보이고 애뜻해 보인다.


그 모든 맥락은 실제 사건들이 포레스트의 무관심과 겹쳐 지나갈 때에야 비로소 발생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적일 때에야 의미가 발생하는 요소도 있으니 바로 배경음악이다. 이 영화에는 무수한 당대 음악을 통해 시대적 정서를 환기하고 있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앨비스 프레슬리부터 밥딜런 지미핸드릭스 도어스 제니스 에어플레인 레너드스키너드(스윗홈 알라바마는 나올 줄 알았다!) 등등. 음악은 사건들과는 달리 그 시대를 직접 매개한다. 사건들은 끊임없이 맥락을 부정하여 그것에 대한 복고를 방해하지만 음악은 다른 부연설명 없이 그 시대를 그대로 묘사한다. 직접 검증해봐야 할 일이지만 시대가 지날수록 음악의 시점도 점점 거기에 맞춰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귀찮아서 일일이 확인하진 않겠지만.


주의하길 바란다. 여기서도 앨비스와 존 레논은 예외다. 존레논과 포레스트가 티비 쇼에 나오는 장면에서 난 탄성을 내질렀으니. 사회자가 포레스트에게 묻는다. 중국은 어땠음? 그러자 대답한다. They hardly got not at all. 옆에서 존이 끼어든다. No possession? 포레스트는 뭐야? 하는 표정으로 다시 말한다. They never go to Church. 그러자 존이 또 끼어든다. No religion, too? 사회자는 그것 참 상상하기 힘들군요. 라고 말한다. 그러자 존이 또 말한다. Well, it is easy if you try. 아는 사람은 알겠지. 이건 존레논의 imagine의 가사다!


스즈미야 하루히 리더론 사고

리더란 무엇인가? 워낙 많이 돌아다니는 통해 원 출처를 알아내지는 못한 위 짤이 보여주다시피 리더는 말 그대로 '이끄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이 정의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리더에 대한 어느 정의든 마찬가지다. 리더가 하는 일과 리더의 소양, 마음가짐, 태도, 책임 등에 대해 자세히 상술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정의든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난 리더에 대해 오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책도 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워낙 귀찮은 일이라서 관뒀다. 그런데 마침 스즈미야 하루히를 다시 점검하면서 나는 놀라운 발견을 하고야 말았다.

바로 리더란 스즈미야 하루히와는 반대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일단 하루히를 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 반대로만 실천하면 된다. 참 쉬운 일인데 이걸 못하는 사람이 지천에 깔려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이 우주 최고의 명작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만 보면 되는데! 이 밀도 낮은 텍스트조차 버거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애니메이션까지 준비돼 있는데! 우리 모두 스즈미야 하루히를 보자. 그리고 이 시대, 그리고 미래에 진정한 리더로서의 자신을 점검해보자. 당신은 얼마나 리더에 부합한 인물인가?

스즈미야 하루히는 어떤 인물인가? 항목을 나눠서 하나하나 설명해 보겠다.

1. 권위적이고 독단적이다.

이 점은 하루히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장 먼저 알아낼 수 있는 속성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인드가 조직 생활과 결부된다면 그 결과는 끔찍해질 것이다. 그는 조직의 위계를 제일 중시하고 모든 명령을 수직 계열화 시키는가 하면 직위가 낮은 사람의 더 많은 수고와 더 적은 보상을 당연히 여긴다. 위 장면을 보라. 평조직원인 쿈은 비오는 날 걷는 것 자체만으로도 중노동에 가까운 비탈길을 내려가 전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가게에 가서 스토브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한다. 참고로, 난 그 비탈길을 직접 가보았는데 올라가는 데만 해도 30분 이상이 걸리는 엄청난 길이었다. 작품에서 보면 쿈이 종종 이 비탈길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데 그건 단순히 쿈이 불평쟁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등교길보다도 가혹한 길이 바로 이 길인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딱히 할일이 없는데도 단원들이 동아리방에 눌러앉아서 귀가를 미루는 일상을 보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길은 그 자체가 지옥이며 저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루히는 이 과도한 업무를 '단지 직분이 낮다는 이유로' 쿈에게 강요한다.

우리 사회도 늘 그러지 않는가. 언제나 높은 계급은 더 많은 편의와 이득을 누리고 낮은 계급은 더 고생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헬조선이다. 기득권층은 위에 앉아 편하게 이권을 누리면서 그 밑의 청년층에겐 더 많은 노력을 강요한다. 이것은 사회 구조상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개인의 잘못된 특권의식 탓이기도 하다. 범죄자도 마찬가지다. 생계형 범죄나 단순히 질서를 어지럽히는 시위, 파업 등에 관한 판결은 가혹하게 때리면서 재벌 총수에게는 '사회 공헌도를 고려하여' 따위의 자의적인 이유를 대며 형량을 낮추고 심지어 걸핏하면 특사로 사면되고 만다. 실제로 국가경제에 더 큰 위험을 끼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의 범죄인데도 말이다. 심지어 전에는 이런 일이 있지 않았는가. 조선대 의대생이 여자친구를 감금 폭력했는데도 '고귀한 의사 나으리의 미래가 걱정되니까' 벌금형을 때렸단다. 건전한 사회라면 '더 많은 힘에 더 많은 책임'이 주어져야 한다. 더 많은 사회적 권한을 가질 수록 거기에 대한 책임이 늘어나야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의식 없이, '그럼 내가 구르랴?'라는 마인드가 온 사회에 만연하기 때문에 각종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여담인데 '권리엔 의무가 따른다' 라는 말은 거짓이다. 이 말을 주워섬기는 사람들은 힘이 약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아주 작은 권리(대부분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로 보장받아야 되는 기본권)에 대한 대가로 가혹한 의무를 당연하게 여긴다. 웃기지 마라. 최저임금을 받는 이유는 그만큼의 노동력을 기대받기 때문이지 니들한테 부려먹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조직원의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고 간단히 묵살하는 이 파렴치한 태도를 보라. 이런 보스를 누가 신뢰하겠는가?


2. 요구사항이 구체적이지 않다.

이것은 비단 리더 뿐만이 아니라 협업 관계에 있는 클라이언트에게도 해당하는 문제다. 하루히는 영화를 찍는 업무를 수행할 때 그 제작 과정과 구체적인 상을 조직원에게 밝히지 않는다. 시나리오를 요구하는 쿈의 요청에 그는 모든 시나리오와 콘티는 자기 머릿속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탓에 스텝과 배우 역할을 하는 조직원들은 어떤 방침에 따라 일을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게 된다.

그의 명령 계통이 얼마나 엉망이냐 하면 특촬물을 찍는 배우에게 각종 험한 말을 하며 눈에서 빔을 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더니 그것으로 항의를 받자 지적해 오는 상대를 '농담도 모르는 뻣뻣한 놈' 정도로 폄하해 버린다. 이것이 얼마나 조직에 악영향을 끼칠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영화감독, 말하자면 프로듀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작업 결과물의 총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작업의 모든 영역에 걸쳐 관여하고 지시를 내려야 한다. 여기에는 물론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각 구성원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자연스러운 조화를 유도하는 방법이 있고 행동 하나하나를 통제해서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는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의 예로 내가 뚜렷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최강희 축구감독이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선수의 자율적인 플레이를 요구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기성용은 다른 인터뷰에서 최 감독이 구체적인 전술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고 답답했다는 점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이는 조직원과 리더의 방향성이 각기 다른 경우였다. 물론, 이 경우에도 잘못은 리더에게 있다. 각 조직원이 어떤 방식에 적응해 있는지 파악하는 것 혹은 자신의 의도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 역시 리더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은 반 할 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다. 반할 부임 이후로 선수단 사이에서 종종 삐져나오는 불만이 반할은 너무 기계적인 축구를 한다는 점이었다. 경기 도중 선수는 항상 감독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하고 자신이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경우에도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감독에게 있다. 리더는 언제나 자율성과 통제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만 한다.

하루히의 경우는 최악이다. 권위적이면서,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지시의 구체성이 없으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구성원을 핍박하는 상사만큼 최악의 상사가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우아하고 느낌 있게 해주라"고 요청한 클라이언트에게 그래픽 디자이너는 어떤 결과물을 제시해야 할까?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는 절대로 타인이 알 수 없다. 지시 사항이 불분명하면 불분명한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지시 사항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하지만 혼내는 내용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듯 '야단 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하급자에겐 어떤 감정이 누적되겠는가. 이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라는 생각 뿐일 것이다. 게다가 실컷 타박해놓고 농담이라니? 직위를 이용해 성추행을 해놓고 농담이라고 말하는 상사와 뭐가 다른가?


3. 사심을 가지고 하급자를 괴롭힌다.

하루히의 미쿠루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너무하다는 생각 뿐이다. 이것은 린치에 가까운 행위이다. 자신이 원하는 연기를 못해준다 해서 폭언에 폭력에 심지어 몰래 술까지 먹이기도 한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는 사소한 질투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히는 부하직원 쿈에게 마음이 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는다. 어쩌면 본인도 구체적으로 깨닫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쿈은 언제나 미쿠루에게만은 살갑게 굴기 때문에 종종 불편한 마음을 내색하기도 했다. 그래서 하루히는 미쿠루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다른 조직원이 아닌 오직 미쿠루에게만 그런다는 것도 하나의 증거다. 물론 쿈이 하루히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지도 못할 만큼 멍청하고 무능한 직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루히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 조직 내 갈등과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보스의 행동이 편향되었고 자신에 대한 린치는 부당하다는 것을 대번에 인지할 것이다. 하지만 가여운 우리의 미쿠루는 어리버리하고 울보고 겁이 많아서 섣불리 반항하지도 못한다. 리더는 모든 조직원에게 공정해야 한다. '사심이 있다'는 것은 행동과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조직원에게 눈치채인다면 그 조직은 끝장이다. 사실 사회라는 것은 공동체가 발전한 형태다. 인류에게 결혼 제도가 생겨난 까닭은 공동체 내에서의 욕망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서로 짝을 차지하기 위한 항구적인 전쟁상태가 벌어질 것이다. 결혼과 족외혼, 근친상간의 금기는 그러한 성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족제도는 사회 전반에 걸친 개인적인 것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리고 사회는 수많은 개별 조직 혹은 공동체 혹은 집단으로 재구성되어 금기의 개별적인 규칙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사내 커플 혹은 과CC 등은 '자유의 영역이긴 하지만 애매하게 꺼려지는' 이상한 상태에 놓이고 만 것이다. 그래서 아예 제도적으로 사내 커플을 금지하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과내 커플을 만류하는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이는 자유의 영역이다. 하지만 상사와 부하직원이 회사 내 어느 공간에서 은밀한 즐거움을 나누는 것에 유쾌해할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적어도 신경은 쓰이게 마련이고 누구도 그것에 대해 '족외 연애'를 할 때만큼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때 리더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조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아니면 어설프게 감춰서 의혹을 사지 말거나, 철저하게 공사를 구분하는 제스쳐를 취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잡음이 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 하루히처럼 괜히 여기저기다 짜증만 내고 다닌다면? 장담컨대 저 조직은 한 달도 가지 않아 와해되고 말 것이다.


4. 예스맨을 항상 곁에 둔다.

코이즈미 이츠키는 그야말로 간사한 예스맨이다. 그는 하루히가 하는 말에 일절 토를 달지 않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칭찬만 해댄다. 그가 하루히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천성적인 아부기술로 부단장의 지위에 오른 것만 보더라도 그것이 하루히를 무척 기쁘게 해줬음은 분명하다.

더군다나 그는 라이벌 조직원을 견제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하루히의 가장 큰 신임을 받고 있는 쿈에게 아사히나 미쿠루의 음모에 대해 고자질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뒤에서 어떤 더러운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위험한 자를 단지 좋은 소리 한다고 곁에 두는 하루히라는 리더는 리더 자격이 없다.


5. 조직 내 가장 유능한 자가 자신보다 하급자에게 충성을 바친다.

생각해보면 가장 위험한 일이다. 나가토 유키가 실질적으로 조직 내에서 가장 유용한 자원임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나가토 유키와 쿈 사이에서는 묘한 유대감이 싹트고 있었다. 엔드리스 에이트 방치 사건에서 보듯 나가토는 하루히가 폭주하더라도 아무런 손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측이 그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쿈과 결부된다면 다르다. 나가토는 쿈을 목숨 걸고 지켜주었고, 쿈이 안경 취향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바로 안경을 포기해 버린다. 소실 사건에서는 사건을 해결할 유일한 적임자로 쿈을 뽑았다. 그뿐만 아니다. 미스테릭 사인 에피소드에서 문을 열어달라는 하루히의 요청은 무시한 채 쿈이 말하자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컴퓨터부와의 대결 시에 사기를 치지 말라는 쿈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다가 상대가 치트를 쓰자 그것을 역 해킹해버리고 거기에 대한 허가를 쿈에게서 구한다. 명백한 명령계통 위반이다. 만일 나가토가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면 쿈이 아닌 단장인 하루히에게서 허가를 구했어야 했다.

위에 상술했다시피 하루히는 권위자형 리더다. 조직의 모든 작동사항을 자기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런 자의 방식이 불합리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조직 내에서 명령계통이 어긋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리더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절대적인 것이 있다. 바로 리더의 책임이다. 리더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말은 역으로 말해서 조직 내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처리하든간에 리더는 다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나가토와 쿈 사이에 애정이 싹틀수도 있지만 그것이 업무상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면 리더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조직원이 멋대로 결재를 내리고 보고조차 하지 않는다면 리더에게 그것을 온전히 책임질 당위는 사라지고 만다. 말하자면 이것은 조직의 총체적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6. 협박으로 조직을 지배한다.

하루히는 언제나 조직원을 동원할 때 공포를 동원한다. 바로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사형시켜버리겠다는 협박 말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하루히의 부하들은 오직 사형당하지 않기 위하여 움직인다. 이것이 얼마나 큰 비효율을 나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군대를 생각해보자. 군대에서는 군가, 교육, 감정적 자극 등으로 애국심을 주입시키려 애쓴다. 왜냐하면 사병들은 징병되어 그 자리에 갔으며 그런 허구의 선전이 없다면 그들의 신체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데올로기적 세뇌 외에도 군은 협박까지 동원한다. 미필자들은 한번 병무청에 전화해서 물어보시길. "영장 나왔는데 안 들어가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면 친절하게(정말로) 설명해 줄 것이다. "며칠까지 입영이 확인되지 않으면 고발조치 됩니다." 병역 이행 자체에는 협박의 메커니즘이 빠질 수가 없다. 하지만 정작 안에 들어가서는 다르다. 전쟁이 발생했다. 지휘관이 맨 뒤에 서서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전진하라. 그러지 않으면 쏘겠다."라는 지휘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네 선택은 무엇이겠는가?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 네가 생명을 조금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은 소수인 장교를 제압하고 탈영하는 것 아니겠는가. 실제로 베트남 전쟁시 빈번히 일어난 프레깅 예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억울하게 추첨으로 군인이 된 병사들이었고 국가는 그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즉, 협박에 의해서는 절대로 아군의 사기를 올릴 수가 없다. 조직은, 설령 그것이 군대라 하더라도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이뤄져 있고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기계에 윤활유를 치듯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줘야 한다. 협박에 의한 조직 운영은 삼국시대에나 하던 원시적인 방법이다.

하루히의 '충격과 공포' 요법은 고양이 이름에서까지 행해진다. 샤미센은 일본의 전통 악기로, 전통적으로는 고양이 가죽으로 만든다고 한다. 고양이에게 샤미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만일 따르지 않는다면 너를 북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이다. 당장 그 고양이는 하루히의 명령을 따르기는 하지만 만일 고양이가 조직 내에서 계속 활동을 했다면 언제 하루히를 암살하고 유유히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샤미센은 지금 하루히의 폭정으로부터 해방되어 쿈의 애완고양이 생활을 하고 있다.



이상으로 스즈미야 하루히라는 인물을 통해서 바람직한 리더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하루히는 리더라기보다는 시대 착오적인 보스에 가까우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차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이끌 기회가 있는 사람, 혹은 자기 조직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은 하루히를 다시 한번 관찰해보시기를 바란다. 아마도 거기에 모든 문제가 들어있을테니. 그래도 리더의 역할에 대해 한 마디로 정리하는 건 필요한 것 같다. 리더는 "목표를 정하고, 앞장서며, 책임진다." 너는 이러한 리더를 많이 만나보았는가? 안타깝게도 난 그러지 못했다. 만일 당신 또한 그러하다면, 네가 그런 리더가 되면 되는 것이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이 글은 당연히 반쯤 농담이다. 하루히에 대한 내 평가가 이렇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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