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하게 겸연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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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2014) 영상

연속으로 ebs영화 특집. <위플래쉬>를 봤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듀나의 칼럼을 먼저 봤다. 그러니까 개봉 당시의 일이다. 제목은 <위플래쉬, 한국에서 유달리 성공한 진짜 이유>. 난 영화를 안 봤고 듀나는 대체로 맞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비로소 영화를 보고 나니 그의 평이 그대로 머리속에 떠오르더라.


듀나는 그 글에서 이 영화가 해석되는 세 가지 방식을 말했다. 다음은 인용이다. "(1) 폭력적이고 위험한 선생과 그에 못지 않게 위험한 정신상태의 학생이 벌이는 대결을 다룬 드라마틱한 영화, (2) 온갖 방법을 동원해 제자의 가능성을 끌어내려는 스승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 (3) 척 봐도 사이코인 놈을 스승이라고 치켜올리는 나쁜 영화. (1)은 감독의 의도이다. (2), (3)은 우리가 이 상황을 한국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내가 떠올린 의문은 이것이다. 아니, 이 영화를 (3)은 몰라도 (2)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놀랍게도 잠깐의 검색만으로 난 숱한 네티즌의 그러한 감상평을 접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이가 없다.


영화에는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다. 그 중 무엇을 취사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에 달렸다. 그것이 해석이 갈라지는 주요한 이유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자주 사용한 롱테이크 기법을 논할 수도 있겠고 아들을 지켜보고 지지해주는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영화의 주제라고 말한다면 곤란하다. 모든 필름에는 의도가 담긴다. 해석의 자유는 무한대로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석이란 그 쇼트와 씬과 조명과 연기와 대사 등등을 한데 아우르는 종합 판단이다. 화석과 지층 등에 비추어 우리가 목격한 적 없는 선사시대 지질사를 추적하는 것과 같다. 특히나 잘 만들어진 영화의 경우는 그 단서가 매우 뚜렷하여 영화 보는 훈련이 된 사람들 눈에는 대체적으로 유사한 학설이 세워지게 마련이다.


(2) 해석을 지지하는 글들을 보면 대체로 앤드류의 정신상태를 간과한다. 그는 스승 못지 않은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인다. 친척과의 대화 씬에서의 삐딱함을 보라. 비록 그가 그 집단에서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자식 자랑에 여념이 없는 그들 대화에 끼어들어 공격적으로 나온 건 그가 먼저다. 선후 관계가 어찌됐든 그는 성공에 대한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플렛처가 처음 기선제압을 할 때 말하지 않았는가. "넌 왕따"라고. 앤드류가 기껏 만난 여자친구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라.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것은 전형적으로 상대와의 대화 맥락을 읽지 못하는 녀석의 대화다. 결정적인 장면은 그가 플렛처를 기소하기 거부한 부분이다. 앤드류의 목적은 오로지 최고가 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그의 사고는 이런 논리를 띠게 된다. '내 목적을 위해서는 나를 학대해도 좋다.' 당연히 여기엔 스승의 목적을 위해 희생된 션에 대한 의도적인 무사유가 포함돼 있다. 션을 죽게 하고서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며 눈물 흘린 스승에 대한 무사유 역시 포함돼 있다. 즉, 우리가 여기서 봐야 할 것은 그의 '열정'이 아닌 '비틀린' 열정이다.

 

플렛처가 앤드류의 집념을 읽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의도가 제2의 찰리 파커를 만들어내려는 것이었다는 것또한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정상적인 열정을 가진 두 사람의 대결이지 스승과 제자의 초월에 대한 열정 따위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가 내도록 말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스파크 자체이지 스파크로 인한 어떤 결과가 아니다. 이게 다 교육이었다능, 하는 플렛처의 인간미 어린 변명과 마지막 씬에서의 함정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그들이 이전에 밴드에서의 월권 문제로 싸웠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교통사고가 나 부상을 입었음에도 자리에 앉으려는 광기와 피흘리는 제자를 방치하고 그것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 스승을 간과한다. 이러한 연출은 그들의 갈등이 통제 가능한 한 수준을 벗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마치 팀 버튼 영화의 배트맨과 빌런처럼 서로 꼬일 대로 꼬인 심사를 서로에게 분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피날레는? 비틀린 심벌을 잡아주고 폭주하는 드럼 솔로를 받아들여 밴드를 마침내 하나로 만든 지휘는? 이해 안 될 게 뭐 있나? 둘이 클럽에서 만났을 때, 그때가 화해 시점이 아니었을 뿐이다. 두 사람의 대결은 마침내 음악적인 황홀경에 이르게 되고 그 순간에 이르러서 비로소 잠깐의 화해가 이뤄졌을 뿐이다. 이 설명을 증명하는 증거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플렛처는 이 무대에서 망칠 경우 음악계에서 영원히 매장된다는 협박을 했었으며 앤드류가 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할 때에도 명백히 당황한다. 그 장면은 두 사람의 마지막 오기이자 대결이었을 뿐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스승과 제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마인부우의 위협 속에서도 대결을 벌이던 베지터와 카카로트의 관계에 더 가깝다. 포레스트 검프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성적 절제가 없는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이다. 내가 이 연주로 널 납득시켜 보겠어. 넌 결코 내 만족에 다다를 수 없어. 물론 둘 중 더 이상한 쪽은 플렛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지 않는다. 충족이란 끝을 의미하니까. 그는 단지 학생들을 불가능한 이상향으로 몰아붙이는 가학성애자일 뿐이다. 그에게 집착하는 제자는? 말할 필요도 없다.


포레스트 검프(1994) 영상

설특선 영화로 EBS에서 방영한 포레스트 검프를 보았다. EBS야 원래 평소에도 명화 방영을 해주는 탓에 딱히 설 특선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설하면 안방극장이 아니겠는가.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리콜되는 영화에는 역시 이유가 있는것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안 보고 있었다니 내가 다 한심해지네.


하지만 아무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에겐 감흥이 반감될지도. 이 영화는 포레스트 검프의 인생을 60년대부터의 미국사와 교차시켜 보여준다. 앨비스 프레슬리, 케네디,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 존슨, 닉슨, 핑퐁외교, 워터게이트 등 굵직한 사건들이 직간접적으로 포레스트와 연결된다. 하지만 이 정치적 이슈는 영화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들은 SF적인 가정조차 아니다. 주인공 포레스트는 말하자면 약간 모자란 사람이다. 그는 자신과 사람들의 복잡한 상관관계나 역학관계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입버릇처럼 '우리 엄마가 말하기를' 입에 달고 다닌다. 그의 행동지침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정언명령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도 단서도 의심도 없으며 그는 오직 엄마가 입력해준 원칙에만 충실할 뿐이...다. 그가 베트남 전쟁에서 살아남은 계기역시 그것이었다. 제니는 그에게 달리라고 말했고 그는 달렸을 뿐이다. 그리고 병영에서 만난 친구 바바와의 약속을 지켰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의 행위는 그가 알지 못하는 상징적 층위를 획득한다. 그는 풋볼 스타가 됐고 전쟁영웅이 됐고 반전시위대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으며 핑퐁외교의 상징이 됐다. 그가 이러한 중층의 아이콘이 돼가는데도 그는 그 의미를 거의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달릴 뿐인데도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것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문득 피곤해져서 3년 몇 개월 간의 달리기를 끝내기로 했을 때 그를 뒤따르던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우리는 어떡해야 되죠?"


바로 여기에 영화의 핵심이 있다. 이 영화는 가장 정치적인 이슈를 거론하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도 탈정치적인 영화다. 영화가 거론하는 무수한 실제 우리가 기억하는 사회적 기표는 포레스트 검프 위에서 항상 겉돈다. 단지 포레스트는 맹목적인 자기 원리를 지켰을 뿐이다. 심지어 그에게는 그것을 회의하는 이성조차 약하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원피스 류 소년만화의 주인공을 겹쳐 보았다. 대의라든가 음모 따위는 모르고 오직 눈앞의 감정에만 충실한 열혈 주인공. 모든 대의를 해체하는 그 막무가내 말이다. 그 우직함에서 로망이 나온다. 그 때문에 포레스트의 사랑, 제니에 대한 사랑은 더욱 순수해 보이고 애뜻해 보인다.


그 모든 맥락은 실제 사건들이 포레스트의 무관심과 겹쳐 지나갈 때에야 비로소 발생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적일 때에야 의미가 발생하는 요소도 있으니 바로 배경음악이다. 이 영화에는 무수한 당대 음악을 통해 시대적 정서를 환기하고 있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앨비스 프레슬리부터 밥딜런 지미핸드릭스 도어스 제니스 에어플레인 레너드스키너드(스윗홈 알라바마는 나올 줄 알았다!) 등등. 음악은 사건들과는 달리 그 시대를 직접 매개한다. 사건들은 끊임없이 맥락을 부정하여 그것에 대한 복고를 방해하지만 음악은 다른 부연설명 없이 그 시대를 그대로 묘사한다. 직접 검증해봐야 할 일이지만 시대가 지날수록 음악의 시점도 점점 거기에 맞춰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귀찮아서 일일이 확인하진 않겠지만.


주의하길 바란다. 여기서도 앨비스와 존 레논은 예외다. 존레논과 포레스트가 티비 쇼에 나오는 장면에서 난 탄성을 내질렀으니. 사회자가 포레스트에게 묻는다. 중국은 어땠음? 그러자 대답한다. They hardly got not at all. 옆에서 존이 끼어든다. No possession? 포레스트는 뭐야? 하는 표정으로 다시 말한다. They never go to Church. 그러자 존이 또 끼어든다. No religion, too? 사회자는 그것 참 상상하기 힘들군요. 라고 말한다. 그러자 존이 또 말한다. Well, it is easy if you try. 아는 사람은 알겠지. 이건 존레논의 imagine의 가사다!


스즈미야 하루히 리더론 사고

리더란 무엇인가? 워낙 많이 돌아다니는 통해 원 출처를 알아내지는 못한 위 짤이 보여주다시피 리더는 말 그대로 '이끄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이 정의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리더에 대한 어느 정의든 마찬가지다. 리더가 하는 일과 리더의 소양, 마음가짐, 태도, 책임 등에 대해 자세히 상술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정의든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난 리더에 대해 오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책도 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워낙 귀찮은 일이라서 관뒀다. 그런데 마침 스즈미야 하루히를 다시 점검하면서 나는 놀라운 발견을 하고야 말았다.

바로 리더란 스즈미야 하루히와는 반대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일단 하루히를 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 반대로만 실천하면 된다. 참 쉬운 일인데 이걸 못하는 사람이 지천에 깔려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이 우주 최고의 명작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만 보면 되는데! 이 밀도 낮은 텍스트조차 버거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애니메이션까지 준비돼 있는데! 우리 모두 스즈미야 하루히를 보자. 그리고 이 시대, 그리고 미래에 진정한 리더로서의 자신을 점검해보자. 당신은 얼마나 리더에 부합한 인물인가?

스즈미야 하루히는 어떤 인물인가? 항목을 나눠서 하나하나 설명해 보겠다.

1. 권위적이고 독단적이다.

이 점은 하루히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장 먼저 알아낼 수 있는 속성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인드가 조직 생활과 결부된다면 그 결과는 끔찍해질 것이다. 그는 조직의 위계를 제일 중시하고 모든 명령을 수직 계열화 시키는가 하면 직위가 낮은 사람의 더 많은 수고와 더 적은 보상을 당연히 여긴다. 위 장면을 보라. 평조직원인 쿈은 비오는 날 걷는 것 자체만으로도 중노동에 가까운 비탈길을 내려가 전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가게에 가서 스토브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한다. 참고로, 난 그 비탈길을 직접 가보았는데 올라가는 데만 해도 30분 이상이 걸리는 엄청난 길이었다. 작품에서 보면 쿈이 종종 이 비탈길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데 그건 단순히 쿈이 불평쟁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등교길보다도 가혹한 길이 바로 이 길인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딱히 할일이 없는데도 단원들이 동아리방에 눌러앉아서 귀가를 미루는 일상을 보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길은 그 자체가 지옥이며 저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루히는 이 과도한 업무를 '단지 직분이 낮다는 이유로' 쿈에게 강요한다.

우리 사회도 늘 그러지 않는가. 언제나 높은 계급은 더 많은 편의와 이득을 누리고 낮은 계급은 더 고생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헬조선이다. 기득권층은 위에 앉아 편하게 이권을 누리면서 그 밑의 청년층에겐 더 많은 노력을 강요한다. 이것은 사회 구조상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개인의 잘못된 특권의식 탓이기도 하다. 범죄자도 마찬가지다. 생계형 범죄나 단순히 질서를 어지럽히는 시위, 파업 등에 관한 판결은 가혹하게 때리면서 재벌 총수에게는 '사회 공헌도를 고려하여' 따위의 자의적인 이유를 대며 형량을 낮추고 심지어 걸핏하면 특사로 사면되고 만다. 실제로 국가경제에 더 큰 위험을 끼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의 범죄인데도 말이다. 심지어 전에는 이런 일이 있지 않았는가. 조선대 의대생이 여자친구를 감금 폭력했는데도 '고귀한 의사 나으리의 미래가 걱정되니까' 벌금형을 때렸단다. 건전한 사회라면 '더 많은 힘에 더 많은 책임'이 주어져야 한다. 더 많은 사회적 권한을 가질 수록 거기에 대한 책임이 늘어나야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의식 없이, '그럼 내가 구르랴?'라는 마인드가 온 사회에 만연하기 때문에 각종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여담인데 '권리엔 의무가 따른다' 라는 말은 거짓이다. 이 말을 주워섬기는 사람들은 힘이 약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아주 작은 권리(대부분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로 보장받아야 되는 기본권)에 대한 대가로 가혹한 의무를 당연하게 여긴다. 웃기지 마라. 최저임금을 받는 이유는 그만큼의 노동력을 기대받기 때문이지 니들한테 부려먹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조직원의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고 간단히 묵살하는 이 파렴치한 태도를 보라. 이런 보스를 누가 신뢰하겠는가?


2. 요구사항이 구체적이지 않다.

이것은 비단 리더 뿐만이 아니라 협업 관계에 있는 클라이언트에게도 해당하는 문제다. 하루히는 영화를 찍는 업무를 수행할 때 그 제작 과정과 구체적인 상을 조직원에게 밝히지 않는다. 시나리오를 요구하는 쿈의 요청에 그는 모든 시나리오와 콘티는 자기 머릿속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탓에 스텝과 배우 역할을 하는 조직원들은 어떤 방침에 따라 일을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게 된다.

그의 명령 계통이 얼마나 엉망이냐 하면 특촬물을 찍는 배우에게 각종 험한 말을 하며 눈에서 빔을 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더니 그것으로 항의를 받자 지적해 오는 상대를 '농담도 모르는 뻣뻣한 놈' 정도로 폄하해 버린다. 이것이 얼마나 조직에 악영향을 끼칠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영화감독, 말하자면 프로듀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작업 결과물의 총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작업의 모든 영역에 걸쳐 관여하고 지시를 내려야 한다. 여기에는 물론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각 구성원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자연스러운 조화를 유도하는 방법이 있고 행동 하나하나를 통제해서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는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의 예로 내가 뚜렷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최강희 축구감독이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선수의 자율적인 플레이를 요구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기성용은 다른 인터뷰에서 최 감독이 구체적인 전술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고 답답했다는 점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이는 조직원과 리더의 방향성이 각기 다른 경우였다. 물론, 이 경우에도 잘못은 리더에게 있다. 각 조직원이 어떤 방식에 적응해 있는지 파악하는 것 혹은 자신의 의도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 역시 리더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은 반 할 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다. 반할 부임 이후로 선수단 사이에서 종종 삐져나오는 불만이 반할은 너무 기계적인 축구를 한다는 점이었다. 경기 도중 선수는 항상 감독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하고 자신이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경우에도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감독에게 있다. 리더는 언제나 자율성과 통제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만 한다.

하루히의 경우는 최악이다. 권위적이면서,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지시의 구체성이 없으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구성원을 핍박하는 상사만큼 최악의 상사가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우아하고 느낌 있게 해주라"고 요청한 클라이언트에게 그래픽 디자이너는 어떤 결과물을 제시해야 할까?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는 절대로 타인이 알 수 없다. 지시 사항이 불분명하면 불분명한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지시 사항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하지만 혼내는 내용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듯 '야단 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하급자에겐 어떤 감정이 누적되겠는가. 이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라는 생각 뿐일 것이다. 게다가 실컷 타박해놓고 농담이라니? 직위를 이용해 성추행을 해놓고 농담이라고 말하는 상사와 뭐가 다른가?


3. 사심을 가지고 하급자를 괴롭힌다.

하루히의 미쿠루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너무하다는 생각 뿐이다. 이것은 린치에 가까운 행위이다. 자신이 원하는 연기를 못해준다 해서 폭언에 폭력에 심지어 몰래 술까지 먹이기도 한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는 사소한 질투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히는 부하직원 쿈에게 마음이 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는다. 어쩌면 본인도 구체적으로 깨닫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쿈은 언제나 미쿠루에게만은 살갑게 굴기 때문에 종종 불편한 마음을 내색하기도 했다. 그래서 하루히는 미쿠루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다른 조직원이 아닌 오직 미쿠루에게만 그런다는 것도 하나의 증거다. 물론 쿈이 하루히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지도 못할 만큼 멍청하고 무능한 직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루히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 조직 내 갈등과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보스의 행동이 편향되었고 자신에 대한 린치는 부당하다는 것을 대번에 인지할 것이다. 하지만 가여운 우리의 미쿠루는 어리버리하고 울보고 겁이 많아서 섣불리 반항하지도 못한다. 리더는 모든 조직원에게 공정해야 한다. '사심이 있다'는 것은 행동과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조직원에게 눈치채인다면 그 조직은 끝장이다. 사실 사회라는 것은 공동체가 발전한 형태다. 인류에게 결혼 제도가 생겨난 까닭은 공동체 내에서의 욕망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서로 짝을 차지하기 위한 항구적인 전쟁상태가 벌어질 것이다. 결혼과 족외혼, 근친상간의 금기는 그러한 성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족제도는 사회 전반에 걸친 개인적인 것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리고 사회는 수많은 개별 조직 혹은 공동체 혹은 집단으로 재구성되어 금기의 개별적인 규칙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사내 커플 혹은 과CC 등은 '자유의 영역이긴 하지만 애매하게 꺼려지는' 이상한 상태에 놓이고 만 것이다. 그래서 아예 제도적으로 사내 커플을 금지하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과내 커플을 만류하는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이는 자유의 영역이다. 하지만 상사와 부하직원이 회사 내 어느 공간에서 은밀한 즐거움을 나누는 것에 유쾌해할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적어도 신경은 쓰이게 마련이고 누구도 그것에 대해 '족외 연애'를 할 때만큼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때 리더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조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아니면 어설프게 감춰서 의혹을 사지 말거나, 철저하게 공사를 구분하는 제스쳐를 취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잡음이 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 하루히처럼 괜히 여기저기다 짜증만 내고 다닌다면? 장담컨대 저 조직은 한 달도 가지 않아 와해되고 말 것이다.


4. 예스맨을 항상 곁에 둔다.

코이즈미 이츠키는 그야말로 간사한 예스맨이다. 그는 하루히가 하는 말에 일절 토를 달지 않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칭찬만 해댄다. 그가 하루히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천성적인 아부기술로 부단장의 지위에 오른 것만 보더라도 그것이 하루히를 무척 기쁘게 해줬음은 분명하다.

더군다나 그는 라이벌 조직원을 견제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하루히의 가장 큰 신임을 받고 있는 쿈에게 아사히나 미쿠루의 음모에 대해 고자질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뒤에서 어떤 더러운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위험한 자를 단지 좋은 소리 한다고 곁에 두는 하루히라는 리더는 리더 자격이 없다.


5. 조직 내 가장 유능한 자가 자신보다 하급자에게 충성을 바친다.

생각해보면 가장 위험한 일이다. 나가토 유키가 실질적으로 조직 내에서 가장 유용한 자원임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나가토 유키와 쿈 사이에서는 묘한 유대감이 싹트고 있었다. 엔드리스 에이트 방치 사건에서 보듯 나가토는 하루히가 폭주하더라도 아무런 손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측이 그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쿈과 결부된다면 다르다. 나가토는 쿈을 목숨 걸고 지켜주었고, 쿈이 안경 취향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바로 안경을 포기해 버린다. 소실 사건에서는 사건을 해결할 유일한 적임자로 쿈을 뽑았다. 그뿐만 아니다. 미스테릭 사인 에피소드에서 문을 열어달라는 하루히의 요청은 무시한 채 쿈이 말하자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컴퓨터부와의 대결 시에 사기를 치지 말라는 쿈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다가 상대가 치트를 쓰자 그것을 역 해킹해버리고 거기에 대한 허가를 쿈에게서 구한다. 명백한 명령계통 위반이다. 만일 나가토가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면 쿈이 아닌 단장인 하루히에게서 허가를 구했어야 했다.

위에 상술했다시피 하루히는 권위자형 리더다. 조직의 모든 작동사항을 자기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런 자의 방식이 불합리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조직 내에서 명령계통이 어긋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리더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절대적인 것이 있다. 바로 리더의 책임이다. 리더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말은 역으로 말해서 조직 내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처리하든간에 리더는 다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나가토와 쿈 사이에 애정이 싹틀수도 있지만 그것이 업무상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면 리더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조직원이 멋대로 결재를 내리고 보고조차 하지 않는다면 리더에게 그것을 온전히 책임질 당위는 사라지고 만다. 말하자면 이것은 조직의 총체적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6. 협박으로 조직을 지배한다.

하루히는 언제나 조직원을 동원할 때 공포를 동원한다. 바로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사형시켜버리겠다는 협박 말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하루히의 부하들은 오직 사형당하지 않기 위하여 움직인다. 이것이 얼마나 큰 비효율을 나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군대를 생각해보자. 군대에서는 군가, 교육, 감정적 자극 등으로 애국심을 주입시키려 애쓴다. 왜냐하면 사병들은 징병되어 그 자리에 갔으며 그런 허구의 선전이 없다면 그들의 신체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데올로기적 세뇌 외에도 군은 협박까지 동원한다. 미필자들은 한번 병무청에 전화해서 물어보시길. "영장 나왔는데 안 들어가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면 친절하게(정말로) 설명해 줄 것이다. "며칠까지 입영이 확인되지 않으면 고발조치 됩니다." 병역 이행 자체에는 협박의 메커니즘이 빠질 수가 없다. 하지만 정작 안에 들어가서는 다르다. 전쟁이 발생했다. 지휘관이 맨 뒤에 서서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전진하라. 그러지 않으면 쏘겠다."라는 지휘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네 선택은 무엇이겠는가?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 네가 생명을 조금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은 소수인 장교를 제압하고 탈영하는 것 아니겠는가. 실제로 베트남 전쟁시 빈번히 일어난 프레깅 예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억울하게 추첨으로 군인이 된 병사들이었고 국가는 그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즉, 협박에 의해서는 절대로 아군의 사기를 올릴 수가 없다. 조직은, 설령 그것이 군대라 하더라도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이뤄져 있고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기계에 윤활유를 치듯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줘야 한다. 협박에 의한 조직 운영은 삼국시대에나 하던 원시적인 방법이다.

하루히의 '충격과 공포' 요법은 고양이 이름에서까지 행해진다. 샤미센은 일본의 전통 악기로, 전통적으로는 고양이 가죽으로 만든다고 한다. 고양이에게 샤미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만일 따르지 않는다면 너를 북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이다. 당장 그 고양이는 하루히의 명령을 따르기는 하지만 만일 고양이가 조직 내에서 계속 활동을 했다면 언제 하루히를 암살하고 유유히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샤미센은 지금 하루히의 폭정으로부터 해방되어 쿈의 애완고양이 생활을 하고 있다.



이상으로 스즈미야 하루히라는 인물을 통해서 바람직한 리더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하루히는 리더라기보다는 시대 착오적인 보스에 가까우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차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이끌 기회가 있는 사람, 혹은 자기 조직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은 하루히를 다시 한번 관찰해보시기를 바란다. 아마도 거기에 모든 문제가 들어있을테니. 그래도 리더의 역할에 대해 한 마디로 정리하는 건 필요한 것 같다. 리더는 "목표를 정하고, 앞장서며, 책임진다." 너는 이러한 리더를 많이 만나보았는가? 안타깝게도 난 그러지 못했다. 만일 당신 또한 그러하다면, 네가 그런 리더가 되면 되는 것이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이 글은 당연히 반쯤 농담이다. 하루히에 대한 내 평가가 이렇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셨으면 좋겠다^^

나가토 유키짱의 소실(애니메이션) 영상

누군가가 나에게 너 데벡아, 모든 매체 통틀어서 네가 가장 사랑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난 0.1 마이크로초의 망설임도 없이 <<스즈미야 하루히>>라고 말하겠다. 내 인생을 바꿔놓았고 내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 같았던 스즈미야 하루히가 발매된지도 한국 기준으론 10년이 다 돼가고 일본 기준으론 12년이 넘어갔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출간 당시에도 이런 호응을 얻었는지는 정보를 접할 길이 없어 잘 모르겠다. 허나 본격적으로 하루히라는 이름이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계기가 2006년 방영된 애니메이션이었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한다. 당시에 애니메이션엔 눈꼽만큼도 관심 없었던 나는 인터넷을 온통 달구고 또 교실에서까지 떠들어대던 그것에 대해 난 오타쿠 문물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어떻게 된 걸까.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듯 <<에반게리온>>을 보았고 이어서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보았다. 그리고 이 길로 들어섰지.

스즈미야 하루히에는 두근거리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비명을 지르고 설레는 맘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사실 하루히는 무척이나 취향을 타는 이야기다. 2000년대의 오덕 코드를 좌우한 한 양식이기도 하고(평범한 소년과 뭔가 특별한 소녀의 만남, 미연시적인 요소) 작중 상황역시 사람에 따라선 지나치게 극단적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는 조금 거창하게 재조명과 총괄적인 평을 작성하고자 하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으나 내 안의 평가가 너무나 부푼 탓에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히를 접한지 몇 년이 지나 더 많은 작품을 접하고난 지금의 평가는 어떨까? 놀랍게도 내 평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히 이래로 10여년동안 난 하루히보다 재미있는 작품을 보지 못했다.

완결인듯 아닌듯한 최신편이 오랜 텀을 사이에 두고 발매된지도 벌써 5년이 다 돼간다. 그 사이 애니든 소설이든 공식 세계관은 전혀 진행되지 않았고 오래된 라이트노벨이 늘 그렇듯 대기열에서 기다리는 듯한 유행의 주기에 맞춰 하루히 시리즈도 점점 잊혀가는것 같았다. 나가토유키짱의 소실은 정발된 것을 대충 훑어보기는 했는데 워낙 달라진 그림체 때문에 손이 가지 않던 작품이었다. 글이 타니가와 나가루라고 돼 있긴 한데 이게 원작자 스토리인지 그냥 원작만 나가루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스핀오프 이상의 스핀오프였다. 그동안 목말랐던 하루히에 대한 갈증을 이것으로 풀 수 있을까 우려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우려는 단숨에 날아가버렸다. 이 사랑스러운 나가토의 표정을 본 순간 말이다!

기본적 개념은 이렇다. 원작 <<소실>>편에서 재구성된 세계관 내에서 전개되는 아무런 특별할 것 없는 일상 러브 코미디.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본다면 원작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스핀오프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즉 원작을 전혀 보지 않아도 내용 이해에 눈꼽만큼의 지장도 없는 완결된 세계관이라는 말. 심지어 나가토의 성격도 소실의 나가토와도 사뭇 다르다. 적어도 소실의 나가토는 소심할지언정 대놓고 부끄럼쟁이는 아니었으며 대놓고 쿈을 짝사랑하지도 않았다. 물론 쿈이 원래래 세계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도 다르다. 작화탓인지도 모르겠으나 <<나가토 유키짱의 소실>>(이하 유키짱이라 칭하겠다)에서 쿈은 좀더 오지랖이 넓고 좀더 덜 시니컬하며 좀더 러브코미디의 주인공에 가깝다. 한없이 자상하고 친절하며 헌신적이고 동시에 둔감하며 우유부단하다.

따라서 굳이 원작과의 서사적 연관성을 분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이 작품은 스핀오프고 원작의 전개와 독립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니까. 그렇지만 전혀 관계가 없는 작품인가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유키짱>>은 내적으로는 독립적이나 외적으로는 원작 없이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다. 장면과 캐릭터와 작중 사건 하나하나가 원작과 병렬로 전개돼 있다. 마치 드라마 데스노트와 같다. 트릭을 이미 시청자가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거기에서 한번 더 비트는 데스노트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유키짱>>에서는 원작의 캐릭터에 대한 사전지식을 전제로 달라진 점을 제시한다.

<<이상이 내가 발견한 패러디들. 이걸 이해한다면 원작을 충실히 숙지하고 있다는 뜻.>>


이 스핀오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이 작품은 나가토 팬들에게 바치는 헌정과 같을 것이다. 언제나 기계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나가토가 표정을 갖게 됐고 감정을 갖게 됐다. 지금까지 나가토에 대한 정서는 내정된 2인자로서의 설움, 가까워질수도 멀어질수도 없는 거리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로멘스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런 처지의 나가토가 이제 전면으로 나서 메인 히로인 자리를 꿰차버렸다. 하루히에게 간택받지 못한 2인자의 설움 역할을 부과한 것도 나가토 팬들에게 있어선 일종의 복수와도 같을 것이다. 그것은 원래의 나가토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경험할 수 없는 감상법이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본편과의 차이점을 부각한다. 나가토의 보모가 된 아사쿠라, 책 대신 게임기를 든 나가토. 그리고 쿈을 둘러싼 평범한 러브코미디. 이것은 일종의 가능성의 세계이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었으면 어떨까? 하고 제시하는 듯한 자기 완결적이면서도 불완전한 세계다.

덕분에 우리의 단장님은 붕뜬 존재가 되고 말았다. 느닷없이 남의 학교에 쳐들어와 소란스럽게 만드는 평범한 파렴치한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하루히 역시 본편의 타임라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물론 중학교적에 미래에서 온 쿈과 그림을 그린 기억은 어릴적 쿈과 만났던 사실로 바뀌어 있었다. 쿈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고 하루히는 내심 아쉬워하면서도 어필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쥐고 흔들었던 본편과 달리 여기서는 일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주변자로 제 2인자로서의 설움을 씹어 삼키는 오히려 본편보다도 입체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에도 본편과 연결되는 단서가 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자. 중학생 하루히는 중학생 쿈을 만나는데 본편의 쿈과 마찬가지로 SOS와 존 스미스라는 키워드를 듣는다. 본편에서는 고등학생 쿈이 한 말이니 다소 인과관계가 어지럽혀짐에도 불구하고 작중 필요했던 선언이었다. 하지만 <<유키짱>>에서는 쿈이 그 말을 할 개연성이 없다. 그 이유는 이렇게 추론할 수밖에 없다 : 바뀐 세계에서도 하루히는 원래 세계와 유사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미래에서 쿈이 왔다는 상황은 용납하기 어려우므로 그 에피소드는 동 나이대의 쿈으로 대체되었다. 쿈이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도 원래 세계의 쿈에게는 그 나이때의 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현재의 하루히에게 키타고로 침입할 동기를 부여한 장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쿈이 엔터 이외의 다른 키를 눌렀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아아, 머나먼 고향이여>

더 중요한 장면은 극중 중요한 전환점인 <나가토 유키의 소실> 에피소드다. 의자에 앉아서 말없이 책을 읽는 것(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트레이드마크였던 나가토가 이제는 게임기를 잡고 앉아있는 캐릭터로 바뀌었다. 밤새 게임을 하느라 잠을 못 자거나 해수욕장에 가서도 게임기를 잡고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나가토는 교통사고를 당하며 변화를 맞이한다. 바로 인격을 잃어버린 것. 그는 자기가 나가토라는 것, 나가토 유키가 이전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다. 말하자면 기억이 그대로 유지된 채 인격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 바뀐 나가토의 성격과 목소리 톤은 영락없는 본편의 나가토다. 관조적으로 현상을 분석하며 책을 좋아하고 말이 짧아진다. 여기서 작가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를 '나'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뒤바뀐 나가토는 이전 기억을 모조리 가지고 있다. 과연 기억의 총체가 '나'일까? 이를테면 <<공허의 유산>>에서 피닉스의 기억을 이식받은 정화자를 보라. 그는 처음에는 자신을 피닉스라고 여겼지만 이내 그것은 피닉스의 기억일 뿐 피닉스와는 다른 고유한 인격임을 받아들인다. 나가토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육체와 기억 모두가 이전 나가토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인격은 그것을 부정한다. 그것은 나가토를 대하는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사쿠라와 쿈은 나가토가 바뀐 것을 알게 된 유일한 친구들이지만 이내 구분된 인격의 차이를 받아들인다.

<책을 든 나가토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사실 내가 좋아하던 나가토는 이런 나가토였다. 얼굴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나가토가 아니었다. 나가토의 고유함은 거기에서 만들어진다. 한번 생각해보자. 평행우주라는 게 있어서 현재의 나가토가 죽거나 다치면 옆 우주에 가서 거기 있는 나가토를 그대로 가지고 온다면. 그러니까 스틸 볼 런에서 대통령이 하는 짓을 보라. 그렇게 해서 가져온 기억도 경험도 심지어 인격도 거의 유사한 나가토가 나타난다면 넌 그것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있는가?>


재밌는 점은 독자의 경험은 이 작품을 전혀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단순한 동일성 문제가 관건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뒤바뀐 나가토의 인격이 사실 본편 나가토의 인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이 세계가 쿈이 선택한 수정된 세계라는 의혹을 가지고 보는 독자라면 그 맥락이 아예 달라질 것이다. 즉, 원작을 제하고 본다면 이 에피소드는 유사 인격이 자기 존중감을 획득하고 미련없이 물러나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원작을 고려하고 본다면 불현듯 나타난 인격이 사실은 본래의 인격이고 그는 세계가 바뀌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퇴장해야 하는 아이러니만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쿈은 단 며칠간 만난 새로운 나가토라 하더라도 그를 별개의 인격으로 대우해주려 한다. 그 때문에 그가 사라지려 할때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렇지만 본편과의 맥락에서 보자면 그는 동일한 딜레마를 부끄럼쟁이 나가토에게서 느껴야 한다. 그가 믿고 그가 몸담은 시공간이 가짜이며 이내 사라져버릴 인격의 편린이야말로 그가 돌아가야 할 원래의 세계였다는 것이다.

만일 이 세계에서 다시 쿈에게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미 쿈은 이 세계를 유의미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만들어진 관계의 진실성은 설령 그것이 누군가의 조작이라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다. 그의 경험, 추억, 지금까지 보고 듣고 생각해온 것들은 이미 그의 안에서 그의 일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기억도 할 수 없는 평행 세계로 통채로 옮겨준다고 한다면 그는 동의할 것인가?

<<소실>>편에서 쿈은 이전 세계의 기억을 유지한 상태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시 그쪽이 좋아. 이 세계는 영 느낌이 없는걸. 미안하다, 나가토. 난 지금의 네가 아닌 지금까지의 나가토가 좋아. 그리고 안경은 없는 게 더 낫겠다."

이 말은 기억을 잃은 <<유키짱>>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그 세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정서가 태어난다. 관찰자(독자)는 그가 어떤 경위로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있다. 그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대신 새로운 기억을 쌓아가는 중이다. 이전에 그렇게 긍정했었던 미래인과 초능력자와 우주인의 세계는 이제 알지도 못하는 세계가 되었다. 여기서 부정되는 것은 관찰자의 기억이다. 관찰자의 기억은 새로운 세계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결국 소외되는 것은 본편을 알고 있는 관찰자다. 바뀐 인격의 나가토가 사라지면서 무효화되는 것은 그 추억이다. 지금 이 작품 내에서 원래의 하루히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영문도 모른 채 소외되고 만 단장님... 아니 본부장.>

<타타이마와 오카에리. 일상적인 인삿말이지만 재패네이션에서는 인물의 심리 및 존재 층위를 나누는 중요한 연출적 클리셰로 쓰인다.>


어쨌든 스핀오프는 스핀오프다. 본편과 서사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없어 보이고 지긋지긋한 연중과 기약 없는 애니메이션 3기 사이에서 가볍게 볼만한 그럭저럭 괜찮은 작품이다. 그냥 나가토와 하루히를 다시 볼 수 있던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하루히는 원작보다도 생동감 있어 보였고 츠루야와 아사쿠라의 가세로 폭주하는 일상도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아가는 것 같다. 아무런 힘도 없는 평범한 하루히의 기행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역시 우주 끝까지 폭주해버리는 하루히다. <<경악>>편이 완결편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으로든 소설로든 어떻게든 이 하루히라는 월드는 계속됐으면 좋겠다. 아니면 아예 완결 도장을 찍어버리든가.

데스노트 드라마(2015), 재해석은 이렇게! 영상

처음엔 개그인줄 알았다. 흔히 바다 건너 소식을 전해받는 루트인 해외 네티즌 반응 어쩌고 하는 포스트에서 대략적인 1화의 캐릭터 소개를 접했을 때 나는 이 드라마를 반드시 시청하기로 마음먹었다. 난 이런 유머를 몹시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드라마를 접했을 때 나는 곧바로 감상을 수정해야만 했다. 이 드라마는 개그가 아니었다. 데스노트 국내 연재 1화부터 팬이었던 나의 동심은  그렇게 농락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작중 철철 흘러넘치는 유머감각은 결국 날 무장해제시키고야 말았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이 드라마는 최고다!

철저한 기획력이 돋보이는 드라마였다. 동일한 캐릭터 동일한 스토리 게다가 동일한 트릭을 가지고 전개하는 몇 탕째 우려먹는 컨텐츠이기에 제작자로서도 새로운 시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감히 바다 건너 시청자가 평하는데 그 시도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시청률이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선 이 드라마에서는 캐릭터의 특성을 모두 뒤집었다. 캐릭터의 축을 이루는 핵심 요소만을 그대로 둔 채 몇몇 작중 특성만 바꿔놓은 것이다. 아참, 미리 경고하는데 혹시라도 이 드라마를 보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이 글은 차후로 미뤄두시기를. 이 리뷰에서는 난 말조심할 생각이 없으니까. 어쨌든 드라마에선 라이토의 성격부터 달라진다. 지나치게 똑똑해서 인생의 따분함을 느껴 오오 마침 데스노트가 여기 있네? 그럼 신세계의 신이나 돼 볼까? 하고 등장해서 작중 모든 인물들을 비웃고 깔보고 잘난척하다 필경사 제반니를 만나 끔살당하게 된 라이토가 (헥헥) 소시민이 돼 버렸다. 다음 자료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 충격적인 등장씬을 보라... 라이토가 무려 아이돌 오타쿠다.(상대는 물론 아마네 미사)>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라이토의 이 소박한 소원을 보라. 그가 다니는 대학교는 딱히 이름 있는 곳으로도 보이지 않고 장래희망은 공무원인데 그나마 말하는 것을 보면 우리 식으로 말해서 9급 정도인 것 같다. 즉 그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소시민 청년으로 캐릭터성이 뒤집힌 것이다.

안다. 알아. 우리의 라간지가 이렇게 헤벌쭉하게 웃으며 그저 그런 남자가 돼 버려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단 거.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자. 이렇게 등장한 라이토는 데스노트를 줍게 되면서 변화를 겪는다. 원작과 다르게 그것을 쓰게 된 계기 역시 충동적인 것이었다.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를 저주하는 마음에, 또 인질로 잡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세상의 악을 멸하기로 마음먹는다.

반면, L은 좀더 완벽해져서 나타났다. 원작의 L이 자폐아에 가까웠다면 새로운 L은 귀공자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손톱도 물어뜯지 않고 허리도 구부정하지 않고 쭈그려 앉지도 않는다. 원작의 L이 단 음식만 먹었다면 이 녀석은 오직 영양제와 칼로리 발란스 류 및 몸에 좋아 보이는 음료수만 먹는다. 거기다 결벽증 속성까지 추가됐다. 똑같은 셔츠를 몇 벌씩 마련해 두고 이물질이 한 방울이라도 튀면 갈아입는 것이다. 말투도 잘은 모르지만 더 자신감 있어진 것 같다. 게다가 마지막 인사에서 보인 친절한 미소는 원작의 L에게선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사교적인 표현이다.

말하자면 라이토는 완전히 망가졌고 L은 거기에 대비되어 완벽해졌다는 소리다. 이에 라이토는 너무나 격차가 나는 L을 상대하느라 진땀을 빼게 된다. 원작의 라이토가 '이 자식 안 되겠어, 어떻게 하지 않으면!' 하는 마음가짐으로 싸움에 임했다면 이 라이토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어쩔 수 없이 L과 싸우게 된다. 이를테면 마츠이로부터 키라가 학생이라는 L의 추리를 전해듣고서 부리나케 규칙을 뒤져 살해 시간을 바꿔버리는 것이다. 이로 인해 L은 정보가 새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수사 범위를 좁힐 수 있게 된다. 원작에서는 그것이 의도한 도발이었는데 말이다. 그가 쓰는 작전들도 어설프기 그지없다. 드라마를 주의 깊게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전 화동안 라이토가 쓴 작전이 그대로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전부 결정적인 순간에 작전이 (원작과 달라지며) 망가지고 우연히, 혹은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심지어 L은 라이토를 이렇게 취급한다.

애초에 라이토는 라이벌조차 아니었고 고작 지방 공무원 지망생이었던 녀석이 L의 영향으로 훌륭한 수사원(보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몸으로 때우는 녀석으로 말이다. 원작의 라이토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육체노동이다. 이 꼬락서니가 얼마나 처량한가. 안락의자에 앉아서 모든 것을 좌우하던 그 녀석이! 바로 이런 전복이다. 이런 전복을 드라마 곳곳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원작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 드라마는 절대로 단독으로 감상될 수 없는 드라마다. 모든 맥락은 원작을 안다는 전제 하에서 언급된다. 동일한 서사의 전복된 맥락. 이것이 바로 유머다.

그리고 거기에서 원작에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맥락이 탄생한다. 처음부터 완벽하고 처음부터 단 한 차례도 망가지거나 흔들림이 없고 사고방식이 바뀐 적이 없던 라이토에서 이제는 소시민에서 악마가 되어가는 라이토로. 이 드라마의 핵심은 거기 있다. 두 천재의 머리 싸움은 이제 알 사람은 다 안다. 팬이라면 적어도 만화와 애니와 영화 중에서 두 종류는 봤을 테니까. 니아를 빼버리고 L이 승리하는 결말 역시 영화로 다뤄졌다. 하지만 누구 하나 야가미 라이토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작에서 그는 지극히 평면적인 캐릭터니까. 악을 미워하고, 천재에, 오만하다. 그뿐이다.

<원작과 다른 장면. 히구치가 눈을 얻었을 때 원작의 라이토는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데 드라마의 '기억을 잃은' 라이토 즉 본래의 라이토는 이렇게 그의 위험성을 먼저 걱정한다. 보라, 오리지날 그 녀석 얼마나 인정머리 없는가?>

하지만 드라마에서 그는 변화한다. 아버지가 실망을 안고 죽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유의미한 차이이다. 원작에서 야가미 소이치로는 끝까지 아들을 믿으며 죽는다. 하지만 드라마에선 아들의 정체를 깨닫고 스스로 노트에 자기 이름을 적고 죽는다. 라이토는 아버지가 노트에 이름을 쓰는 동안은 소리만 지를 뿐이다. 이때 소이치로는 말한다. 지금의 네 망설임이 살인을 저지른 거라고. 반면, 소이치로가 노트를 불태우려 하자 라이토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저지하려 한다. 선하고 욕심 없는 아들에서 대량 살인자로 변모하는 시점은 이 부분이다. 자신보다 우월한 탐정의 집요한 추적, 그리고 아버지의 의심에 떠밀려 라이토는 악마가 되기로 한다. 이때 '어쩔 수 없이'와 '스스로'는 동시에 붙일 수 있는 수사어구다. 분명히 그는 떠밀려 그렇게 된 감이 있다. 비록 스스로 악마가 되겠다고 결심하나 상황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진작 그것을 그만뒀을 것이다. 그것이 사실상 소시민의 한계이자 본질이기도 하다. 그것은 소시민의 역설이다. 라이토는 '선량한 사람들의 소소한 삶을 위협하는 악'을 싫어한다. 그런데 그의 이상을 위해서는 스스로 키라라는 거창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즉,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소시민에게 안식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미로다. 이 세계가 소시민들에게 가하는 본질적인 폭력이다. 그 폭력에 떠밀려 라이토는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그 유명한 키라의 명언 '신세계의 신'을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나 언급하고 또 원작보다도 좌절하고 고통스럽게 죽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이곳은 소시민을 위한 세계가 아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L의 최후에서 설명이 좀 안 된 부분이 있었다는 것. L은 가짜 노트에다 라이토가 자기 이름을 쓰게 해서 범인임을 입증하려고 했는데 그 작전이 먹히려면 1) 라이토가 눈을 가진 키라와 접촉했고 2)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자기 이름을 알아낸다는 것을 확신해야 함. 그런데 일단 제3 키라가 누구인지는 아직 단서도 없는 상태고, 검사의 호텔 급습은 L이 예상한 범위가 아닐 터인데 그렇다면 L로선 라이토가 거기다 자기 이름을 적어준다고 확신할 수 없다. 결국 그 자리에 나타난 미카미 테루에게 L은 살해당하는데 만일 제3의 키라와 라이토가 접촉했음을 전제했다면 언제가 됐든 자기 목숨이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 즉 라이토가 노트에다 자백을 하기 전에 자신이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라이토의 정체를 밝힌 다음 살해당하는 건 뭐 각오한 일이겠지만 뜻도 못 이루고 죽을 확률을 자기 작전에 끼워넣었다는 건 아무래도 L 답지 않다.

혹시 내가 못 보고 지나친 게 있다면 누구 설명해 주시길.

그리고 이 드라마 최대 수확은 바로 니아가 아닌가 한다. 니아역시 자폐증 소년에서 이미지 체인지를 했는데, 그 방향이 몹시 바람직하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니아라니! 찬성찬성 대찬성일세. 오직 니아의 미소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대성공이라고 난 확정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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